[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29]

1. 며칠 전 한국 종교의 진로를 고민하는 종교인들의 간담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깨달음의 신비화’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였다. 우리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한다.

이 말은 불교에서 출가자들이 깨달음만을 중시해 재가(在家) 신도들의 종교적 욕구를 돌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선(禪) 수행 외에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태도 말이다. 문제는 출가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이면 신도들은 깨달음을 신비롭게 여겨 이를 자신과 거리가 먼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커진다는 점이다. 신도들이 출가자들에게 아우라(aura)를 부여하고 그들을 신성시하는 대신 자신의 수행은 소홀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선 결정론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이 불교 측 인사의 전언이다. 첫째, 불교에 팽배해 있는 이 생각 때문에 재가 불자들은 무종교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종교성을 갖게 되었다. 둘째, 출가자들은 과정을 중시하는 수행보다 순간적 깨달음이라는 결과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수행 과정에서 얻는 지혜들을 신도들의 사정에 맞게 풀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되었다. 셋째, 수행 중심의 풍토는 중생들이 현실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불교는 사회 참여에 관심이 적고, 실제 활동도 별로 없는 종교라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결국 이 태도가 불교의 사회적 위신을 약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출가자들은 깨달음을 이상화하는 만큼 수행에 투철하지 못해 깨달음도 현세의 불국토(佛國土)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깨달음의 신비화’가 ‘깨달음의 현재화’를 저해해 결국 ‘얻는 바가 적었다’.

▲ (이미지 출처 = flickr.com)

불교가 국교인 나라에서도 이러한 태도는 문제가 되겠으나, 우리나라처럼 종교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된다. 경쟁하는 이웃 종교가 이와 다른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불교의 약점이 더욱 도드라지는 까닭이다. 실제로 20세기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다른 외재적 변수들이 작용하긴 했지만(일제의 왜색 불교화 시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불교 차별 정책) 그리스도교의 도시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중생들의 일차적 욕구에 충실히 부응하는 접근법 때문에 경쟁에서 뒤쳐졌다. 그리스도교는 ‘깨달음의 현재화’에 주력하여 신도들과 사회적 위신을 얻었는데, 불교는 그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현재도 이러한 태도를 개선할 의지가 적어 보인다.

나는 이 간담회에서 불교 측 인사로부터 천주교가 요즘 사회적 역할을 잘 하고 있어 부럽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부러움과 칭찬은 물론이고, 그는 천주교의 사회참여를 ‘깨달음의 신비화’와 대비되는 ‘깨달음의 현재화’ 사례로 평가하였다. ‘깨달음의 현재화’는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지금 여기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는지에 관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일단 칭찬으로 들었지만 듣는 내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최근 천주교 신자들이 이웃 종교에서 부러워하는 이러한 노력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나는 이 단어를 ‘영성의 신비화’로 옮겨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보려 한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위대한 모범으로 평가되는 성 프란치스코, 성녀 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 오상의 비오 등과 같은 인물들을 목표로 삼고, 일상에서 소박하게 실천해야 하는 일들을 간과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에 적용해 보려 한다. 이 정도는 아니어도 수도자들의 일부가 ‘영성 절대주의’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기도생활에만 몰두하고, 사회정의와 공동체 생활은 멀리하는 태도에도 이 개념을 적용해 보려 한다.

나는 이러한 ‘영성의 신비화’ 경향이 불교의 ‘깨달음의 신비화’ 만큼은 아니지만 신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스스로의 노력보다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기대어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만연한 경우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평신도의 성화 소명을 강조하였음에도 이러한 태도가 한국교회에서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신자들이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더라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깨달음의 현재화’ 즉 ‘영성의 현재화’ 노력을 통해 신자들과 국민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고 있다면 굳이 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을 터. 그런데 이런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떠도는 말들이나 피상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면 영성의 과잉이라 할 만한데,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정작 진정한 영성은 발견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3.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과제가 ‘영성의 탈신비화’다. 이른바 영성을 성직자와 수도자의 전유물에서 그리스도인의 성화 소명에 맞갖게 평신도도 이를 공유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입는 옷은 직무상의 차이를 드러낼 뿐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본분에서는 차이가 없음을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실제 성과는 거의 없는데 영성을 신비화하고, 이를 매개로 권위를 얻으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신 영성을 구체적인 삶 안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도 길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태도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 해서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이론과 방법들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겠다. 또 그렇게 말만 하는 이들도 따르지 말아야 하겠다.

▲ (사진 출처 = pixabay.com)

나는 이러한 과업을 ‘영성의 엘리트주의’를 극복하는 ‘영성의 대중화’라 부르려 한다. 순교 상황이 아닌 지금 ‘적색 순교’를 강조하는 일, 영성의 대가들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일, 관상을 활동보다 우위에 두는 일, 그리고 영성은 출가자들만의 영역이라 느끼게 만드는 말과 행동들을 이제 지양해 보려는 것이다.

내가 볼 땐 배교했다 다시 돌아온 이들이 우리의 실제 모습에 더 가깝다. 늘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모습 말이다. 영성의 대가보다는 작지만 일상에서 신앙을 지키려 노력하는 평범한 신자들의 모습이 소중하다. 우리의 일상이 관상적 활동으로 채워지도록 신앙과 사회생활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모습도 훌륭한 태도다. 이러한 영성에 출가와 재가가 따로 있지 않다. 물론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평신도들이 이런 자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 평신도들의 자각이다.

4. ‘영성의 신비화’ 경향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한 ‘내면주의 영성’, 곧 “육신도 없고 십자가도 없는 순전히 영적인 그리스도를 원하는”(복음의 기쁨, 88항) 태도이자, “병적인 개인주의에 꼭 들어맞는 일종의 영적 소비주의의 형태”(복음의 기쁨, 89항)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 자신이 성화되고,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의 목마름에 적절히 대응하고.... 자신을 치유해 주고 해방시키며 생명과 평화로 가득 채워 주면서 또한 형제적 친교와 선교의 풍요로움으로 부르는 영성”(복음의 기쁨, 89항)에 이르면 다행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과 교회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불행을 피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 영성의 탈신비화의 예를 소개하고 마치려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이다. “복음은 과감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라고, 곧 그들의 육체적 현존과 만나라고 끊임없이 초대합니다. 이는 그들의 고통과 호소를 또 잘 번져 나가는 그들의 기쁨을 직접 대면하여 만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88항)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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