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0]

1. <가톨릭 평론> 편집회의를 하다 편집위원 가운데 한 분인 김진호 목사로부터 흥미 있는 질문을 받았다. 질문인즉 ‘가톨릭 냉담자들 가운데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이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가?’였다. 자료가 부족한 터라 마땅한 답을 하지 못했다. 회의 뒤에 더 질문을 받았으나 역시 상식선에서 답변하는 데 그쳤다. 이 과정에서 흥미는 있었지만 당장 무엇인가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 동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 이건 해볼 만한 연구지. 암 해볼 만하고말고.” 해서 한동안 특별한 이슈가 생기지 않는 한 이 문제만 다뤄 볼 결심을 하게 되었다.

2. 냉담자를 ‘쉬는 교우’로 부르는데 우선 이 말뜻부터 살펴보려 한다. ‘쉬는 교우’는 ‘차가워진, 또는 희미해진 사람’이라는 뜻의 냉담자보다 부드러운 표현이다. ‘식긴 했어도’ 온기가 다 사라진 사람, 즉 완전히 교회를 떠난 사람은 아니어서 다시 뜨거워질(혹은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가 섞여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상태’일까?

3. 2015년 12월 31일 현재(2015 한국 천주교회 통계 참조) 천주교인의 미사 참석률은 전체 교적 신자의 20.7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럼 나머지 79.3퍼센트가 ‘쉬는 교우’인가? 답이 그리 간단치 않다. ‘2015년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서 성탄판공 비율이 30.6퍼센트, 부활판공 비율이 31.7퍼센트였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미사 참석률 보다 높은 30퍼센트대 초반의 신자들이 종교사회학적 의미의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다. 물론 이 비율도 정확치 않다.

미사 참례자 가운데도 매주 참례하는 신자와 간헐적으로 참례하는 신자가 있다. 판공만 하는 신자도 있다. 쉬는 교우 기준에 들지 않을 만큼 몇 년에 한 번 성사만 보는 신자도 있다. 교무금은 책정하되 판공성사와 무관하게 사는 신자도 있다.(교무금 책정 비율은 판공성사 비율보다 높은데 이는 가구 수 기준일 경우가 많아서 ‘쉬는 교우’ 비율을 추정하는 데 적합지 않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구역장, 반장의 눈에 띄면 나머지 가족들은 쉬는 신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름의 기준을 통해 쉬는 교우 비율을 계산해냈지만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쉬는 교우’에 대한 대책조차 포기한 셈이다. 그러니 이들이 전체 신자 가운데 어느 정도 비율을 차지하는 지 알 도리가 없다.

아마 넉넉하게 잡아 40퍼센트 정도가 최소한 몇 년에 한 번 이상 본당에 얼굴을 비치는 경우로 추정된다. 그러면 나머지 60퍼센트에 ‘아예 떠나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 아예 떠났으나 그래도 먼 훗날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교적에는 올라 있으되 아예 활동할 마음이 없는 사람, 신앙생활을 재개하겠다는 마음이 희미하게나마 있지만 아직은 움직일 의사가 없는 사람, 교적도 있고 나름 신자로서의 정체성도 밝히지만 활동에 참여할 의사가 거의 없는 사람, 여러 이유로 잠정적으로 쉬는 사람 등’이 들어간다. 가끔 교적정리 대상이 되는 사람, 서울교구처럼 이향자 사목부로 옮겨지는 사람 등이 아예 떠났거나, 휴식이 장기화되는 경우로 추정되는데 이 경우가 아니어도 이런 상태에 준하는 이들이 다수 있을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4. ‘쉬는 교우’에 대한 양적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대체로 곧 ‘재개한다’거나 ‘재개할 것이나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5퍼센트 이상을 넘었다. ‘개종할 것이다’라든가, ‘모든 종교를 포기할 것이다’라는 응답은 7퍼센트 아래였다(가톨릭신문사 창간 80주년 기념 천주교 신자의 종교의식 조사 제7장 참조). 이 때문에 교회 입장에서는 희망의 끈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의 복귀 시기가 지연되면서 과연 이들이 복귀 의사가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 커졌다.

그동안 ‘쉬는 원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 믿었던 ‘고해성사’ 부담은 실제론 위의 조사에서 7.4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러한 신자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교회가 고해성사 부담을 줄여 주는 조치까지 취했는데, 아직 눈에 띄는 성과를 확인하기 어렵다. 아마 시간이 지나도 현재 수준을 넘지 않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5. 본격적으로 ‘쉬는 교우’ 연구를 시작하려고 보니 주변에 있는 이들의 존재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김진호 목사가 질문한 경우와 정확히 들어맞진 않지만 지인들 가운데 가톨릭 수도자였다가 조계종 승려가 된 이, 목사가 된 이, 심지어 신흥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이, 1980년대 말 교회 모습에 실망해 대거 교회를 떠나 한국 시민사회의 기틀을 놓은 이들, 교적은 있으되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들이 제법 있다.

사실 ‘쉬는 교우’는 종교사회학적 의미의 종교성 기준에 비춰볼 때 그리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자는 ‘회두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특정 단체에서는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바친다. 그럼 방금 언급한 지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일까? 아니 이들은 잘 못 살고 있는 것인가?’

남아 있는 이들의 삶을 보면 이들에게 모진 평가를 내릴 자신이 없다. 남아 있는 이들이 이들만큼 잘 살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우니 말이다. 사실 ‘쉬는 교우’ 만큼이나 ‘남아 있는 이들’도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아마도 두 대상 사이에는 백지 한 장 차이밖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쉬는 교우 연구는 남아 있는 이들의 연구가 될 수밖에 없다.

6. 지금까지 이뤄져 온 양적 조사에서 ‘쉬는 교우’들에게 사용한 질문들이 정확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20대 총선에서 전문가들이 거의 예측에 실패했듯이 교회 안의 전문가들도 ‘쉬는 교우’ 현상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는 조사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인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발견했던 바처럼 양적 통계 이면에 넓고 깊은 속이 존재한다. 이들의 속은 양적 통계로는 다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넓고 깊다.

사실 양적 조사에서 파악한 답이 신뢰할 만하다면 지금쯤 미사 참석률은 40퍼센트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계속 감소해왔다. 해서 양적 조사를 계속 하더라도 질적 연구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질문도 이제와는 달라야 한다.

6. 나는 우선 ‘쉬는 교우’ 현상을 이해한 다음, ‘남아 있는 교우’들의 속을 들여다 볼 생각이다. 아직 시간이 많지 않아 필자 가까운 데서부터 심층면접법(in-depth interview)을 이용해 ‘쉬는 교우’들에게 다가가 보려 한다. 아마 우리가 생각해 왔던 바와 다른 원인이 많이 발견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세속화 이론에서 말하던 냉담 원인들도, 교회 안에서 전문가들이 말하던 내용들도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이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국사회에 고유한 원인들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부디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왜 가톨릭을 선택하고, 왜 머무르며, 또 떠나는지 알게 되길 바란다.

7.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과 한번 만나고 싶다. 만나서 연구 방법론과 조사 내용에 대하여 의논하고 싶다. 과정 중에 발견한 사실들에 대해 토론하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연락처는 편집국에 문의하시면 된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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