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1]

지난 글에서 여러분에게 조언을 청했는데 아는 신부님이 냉담자 대신 남은 신자들을 연구해 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주셨다. 감사드린다.

사실 난 냉담자 연구가 남은 신자들에 대한 연구라 생각하고 있다. 현재 남은 신자들은 언젠가 냉담자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예비 냉담자이고, 지금 냉담자들 가운데 일부는 언젠가 다시 돌아 올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예비 신자다. 이 두 집단은 언제고 입장이 바뀔 수 있는 처지에 있다. 다만 냉담 집단이 훨씬 덩치가 크고, 반드시 복귀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 대상이다.

무엇보다 이 연구는 왜 한국인이 가톨릭 신앙을 선택하고 또 버리는가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무지개나 겉에 드러난 부분은 작지만 밑에는 거대한 본체를 숨기고 있는 빙산과 같다.

냉담의 원인을 탐구하려면 먼저 왜 신자가 되려고 하였는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동안의 신자 의식조사 결과들을 참조할 때 가톨릭에 입교하려는 동기 가운데 가장 컸던 것은 늘 ‘마음의 평화’였다. 일례로 가톨릭신문사 80주년 기념 신자의식조사에서는 이 원인에 37.3퍼센트가 답하였다. 그 다음이 태중 교우로 25.7퍼센트였다. 한국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2014) 조사에서도 종교인들의 절반 이상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종교를 선택하였다.

그럼 종교인 가운데 40-50퍼센트가 일차적 동기로 생각한 ‘마음의 평화’는 다 같은 뜻일까? ‘마음의 평화’가 이 응답자들에게 다 동일한 의미였느냐는 것이다.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응답자들 안에서도 커다란 입장 차이가 존재할 터이다. 그래서 이들이 원하는 ‘마음의 평화’는 보통 입교동기를 물을 때 사용하는 10여 개 범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빙산으로 보아야 한다. 짐작건대 ‘마음의 평화’ 안에도 매우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태중 교우’도 마찬가지다. 부모 덕에 세례를 받았지만 이들이 다 과거 구교우 가정이나 가톨릭 국가의 가정들처럼 자연스레 신앙을 익히진 않는다. 이들이 다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들 비율만으로도 현재의 미사 참석률을 넘겨야 한다. 이들을 교육시킨 부모까지 다 나오면 미사참석률은 최소 50퍼센트 이상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현재 미사참석률이 21퍼센트에 머물고 있으니 유아영세자들이 모두 신앙생활에 적극인 것은 아닌 셈이다.

아마 태중 교우가 되는 경로도 매우 다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구교우 집안이어서 부모와 조부모의 적극적 관심 속에 유아영세를 하고, 이후로도 가족의 지지를 받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영세한 지 얼마 안 된 부모가 신앙의 열정으로 자녀를 영세시켰으나 이후의 교육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아이들이 커서 거부할 수도 있고. 대체로는 시켜야 하니 시켰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시키니까 한 경우가 많았을 터. 그러니 태중교우 집단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것이다.

이처럼 냉담자 연구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이유를 밝혀내야 하는 필생의 과업일 수 있다. 해서 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오래 접근해 보려 한다.

▲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그 사이 냉담 신자 몇 명을 심층 면접하는 기회를 가졌다. 다는 아니지만 이들은 다 ‘본당 교우간 갈등’ 때문에 냉담하였다. 참고로 가톨릭신문사 조사(80주년, 2006년)에서는 이 원인에 해당하는 비율이 2.4퍼센트였다. 1위는 ‘생계나 학업’(50.4퍼센트)이었다. 이 원인은 전체에서 ‘가정 내 종교 갈등’(1.6퍼센트)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답이었다. 아마 다들 이리 낮은 비율을 차지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그리 생산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이것이 ‘생계나 학업’과 같은 이유의 심층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만난 분들은 다 이웃 종교에서 옮겨온 분들이었다. 한 경우는 입교하기 전 했던 종교체험 때문에, 다른 경우들은 천주교에 대한 호감적 이미지 때문에 옮겨 오기로 결심한 경우였다. 다들 천주교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긍정적이었다. 예를 들면, ‘성직자, 수도자는 예수님과 같이 완벽한 존재, 신자들은 인격적으로 꽤 성숙한 사람들’로 볼 정도로 인상이 좋았다.

이들은 보통의 새 신자들보다 더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영세 받은 지 반년 만에 반장이 되거나,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전업주부들이어서 집안 일 외에는 거의 성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3년간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런데 활동을 하면 할수록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먼저 이들의 열성을 반가워할 줄 알았던 기존 멤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설친다’, ‘나댄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도 기존 멤버들의 소극성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단체장이나 구역장으로부터는 월권하지 말고 ‘조용히 시키는 일이나 하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했더니 노골적인 비판과 따돌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고 급기야는 같이 있는 신자들의 이중성(가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제와 수도자들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열심히 하면서 본당의 중심에 접근해 갈수록 자신들의 생각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늘 갖는 의문이다. 개신교에서 옮겨 온 신자들한테서 천주교에 대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가 돈과 신자들의 열성이다.

먼저 돈은 개신교에서 습관이 된 대로 내려고 하면 기존 신자들이 만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너무 많이 낸다. 남들이 내는 만큼 내라!’는 충고를 해 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머지않아 보통의 신자들처럼 내게 된다고 한다.

열성은 좀 복잡하다. 개신교는 신자들이 열성을 내면 서리집사, 집사, 권사, 장로와 같이 직급을 올려 준다. 물론 모두 봉사직이지만 내가 관찰한 결과로만 보면 계급인 것 같다. 이 틀에도 만족하지 못하면 개인적으로 선교회, 단체를 만들거나, 단기 속성 과정의 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기도 한다. 열성이 있으면 계속 채울 수 있는 단계, 활동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열성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앞의 신자들처럼 영세 후 열성을 보이는 신자들을 기존 신자 대부분은 ‘수련자의 열정’이라 평가할 것이다. 갑자기 활활 타는 불은 금세 꺼지고 그 열기도 식기 마련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가까이 오면 피할 것이다. 그들이 나더러 자신처럼 열성을 보이라 요구할까 두려워서다. 다들 피하니 그나마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 단체다. 단체나 반은 늘 사람이 부족해 이런 이들을 반갑게 맞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이들의 열성을 다 담아내자니 기존 틀이 좁고, 그렇다고 밀어내자니 회원 숫자가 적다. 그래서 같이 가 보려 애쓰는데 이들과 함께하는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단체장 몫이다. 단체장에 따라서는 이런 이들에게 자리를 내 주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그 자리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일수록 새 바람을 싫어한다. 그래서 일단 지키고, 굴러온 돌이 감히 박힌 돌을 뽑아낼 수 없도록 밀어낸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들려 준 이야기가 평신도끼리도 ‘명령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 ‘신앙이 아직 부족하다’, ‘아직 신앙 경력이 짧아 뭐가 뭔지 몰라서 그런다’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가장 열성적인 신자들은 성직자, 수도자가 되었다. 남은 신자들 안에서는 단체에서 터줏대감을 하는 이들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물론 교회의 경계를 넘어 동일한 신앙의 지향을 가지고 세상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본당 안이든 수도원을 기웃거리든 열성이 있는 신자들은 무엇인가 부지런히 한다. 그런데 이들도 일정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그 열정을 표현할 곳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이들이 자신의 신앙적 열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방법은 없는가? 물론 내가 볼 때는 많다. 그러나 이들은 본당의 틀을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틀 안에서는 새장 안에 갇힌 새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단체장과 부딪히지 않으면 곧 수녀 신부와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 ‘잠잠하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수도원에 찾아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 대충의 이야기가 이러한데 독자 여러분은 이런 분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실 것인가?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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