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5월 22일(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독립투사 후손이라 말하는 분을 만났다. 떳떳한 조상 덕에 여전히 떳떳해 하며 기념사업을 한다 했다. 그 기념 사업엔 친일의 흔적이 있는, 그 친일의 기득권에서 놀아나고 있는 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거침없이 말했다. 사랑과 화해, 그리고 자비를 이야기하면서.... 문뜩 머리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29-30)

예수를 믿고 지금 우리 삶에 예수를 살려내는 것은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데서, 혹은 하느님께 드리는 화려한 기념사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알려 주셨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우리가 그 가르침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께 드리는 공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2000년 교회 역사 속에 이미 충분치 않았던가?!), 예수가 가르친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예수를 계시하는 역할을 맡는다(요한 14,16-17; 15,26; 16,13; 1요한4,6; 5,7). 예수를 따르고 하느님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 계시되었고 선포되었던 예수의 말과 행적을 지금 내 삶에서 되짚어보는 데서 시작한다.

세 위격이 각각 다르면서 어찌 본성상 하나되는지 묻는, 이를테면 하느님 속성이 뭔지에 대해 묻는 일은 ‘신비’로서 제한되고, ‘안다’고 하면 오히려 무식해지는 ‘모름’의 겸손을 재촉하는 질문이다. 다만,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성부든, 성자든, 성령이든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받은 것만을 이야기하셨으며, 성령 역시 성부로부터 받아 성자가 가르친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부의 뜻을 성자가 ‘스스로’ 알아서 제 방식대로 제 해석대로 발전 혹은 변화시키지 않았고, 성령이 성자의 뜻을 ‘현실’의 핑계로, ‘시류’의 핑계로 고쳐 가르치고 일깨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두 마디는 이를 확연히 드러낸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3.15)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번이나 되씹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고아들을 돌보다', 얀 데 브레이, 1663. (출처 = en.wikimedia.org)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옛 것과 그 정신이 잊혀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옛날이 어찌 된 지도 모르면서 사랑으로, 화해로, 자비로 미래를 이야기하곤 한다. 친일이든, 친미든, 그로 인해 무수히 아팠고, 아파하는 이들이 옆에 버젓이 살아 숨쉬는 데도, 우리는 이제 화해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랑, 화해, 자비라는 말은 대개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유지하고픈 이들의 탐욕을 감춰놓는 미구(美句)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예수를 기억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옛 것을 다시 되새기는 일이다. 하여 이 한 구절을 오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찬찬히 되씹고 삼켜 본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4.17)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