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5월 15일(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스승의 죽음을 따르는 제자들은 보이질 않는다. 세상에 맞서다 죽어 간 스승을 따르기는커녕 세상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으니 말이다. 제자들이 용기 없다 탓할 일도 아니다. 세상의 권력은, 하느님마저도 죽여버린 세상의 폭력은 그만큼 무섭고, 그만큼 굳건하다.

예수를 따른 제자들 그 뒤, 수많은 순교자들 그 뒤, 셀 수 없는 성인과 성녀들 그 뒤, 우리 신앙인은 여전히 예수를 따르고 있다. 2000년 전 일을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으로 되새기며 신앙인은 세상 안에 머문다. 다만 주간 첫날 저녁, 그렇게 굳게 잠가 놓았던 문은 과연 열렸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한다.

▲ '의심하는 성 도마', 카라바조(1601-1602).(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세상이 두려워 잠가 놓았던 문을 뚫고 들어온 예수가 내뱉는 일성은 이러하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인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라!" 다른 말로 고쳐보자. "세상에 나가라! 세상을 용서하라! 그게 성령을 받은 자의 몫이다!"

세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제 자신이 비겁해서 교회 안에만 머무는 우리가 아닐까. 세상에 저항한 시대의 선지자들 혹은 순교자들을 기념하면서도 세상에 저항하지 않는 우리는 2000년 전 그 문을 열어 놓았는가.

세상에 대한 비겁함이 신앙적 온화함이나 윤리적 예의 바름으로 인식될 경우가 많다. 세상에 아무 말 못하면서 세상을 다 알고 지혜로운 도인인 척 행동하는 종교인들은 여전히 문을 잠근 채 저들끼리 기뻐할 수 있다. 2000년 전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기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다. 신앙인은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기뻐하는 것은, 살아 생전 보았던 '사람' 예수를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지, 죽음의 흔적을 넘어선 '하느님' 예수에 대한 믿음은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20,24-29 참조).

문을 걸어 잠근 채,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여전히 성경을 읽을테고, 공부할테고, 기도할 것이다. 저 혼자 발견한 학문적, 신앙적 기쁨에 도취해, 문 밖의 세상엔 게을러지거나 냉소하는 버릇이 생겼다. 육화한 예수를 알면 알수록 세상을 모르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한 건, 순전히 문을 걸어 잠근 나의 비겁함과 옹졸함 때문이다. 박제된 내 신앙으로 세상에서 죽어간 예수는 존경과 기념의 대상이 될 뿐, 내 삶의 일부는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깨우쳐 주시는' 성령은 오늘도 내게 오셔야만 한다.(요한 14,26 참조)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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