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5월 8일(주님 승천 대축일) 루카 24,46ㄴ-53

예루살렘.... 예루살렘....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신이 있으니까, 그의 현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예루살렘의 절대적 가치는 ‘두말하면 잔소리’가 된 지 오래다. ‘왜 예루살렘인가?’라는 물음조차 불경스럽게 여겨진다. 루카는 예수의 탄생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그리고 있고(루카 2장), 복음서 전체를 걸쳐 예루살렘으로 걸어가는 예수를 강조한다. 나아가 교회가 시작하는 지점에서도 예루살렘은 빠지지 않는다.(사도 1장)

그럼에도, 그러함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의 질문에 사로잡힌다. ‘왜 예루살렘인가?’.... 이 ‘불경한 고민’은 전통적으로 강조되었던 예루살렘의 가치를 다시 묻게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너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도대체 성전이 무엇이고 예루살렘이 무엇인가의 문제가 ‘불경한 고민’이 되는 건, 습관적인 것에 파묻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을 포기한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이를테면, ’성당 왜 가야 하나?’라는 질문에 겸연쩍어 하며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라. 성당 가서 삶의 설렘을 맛보는 자에겐 이 질문은 가당찮겠지만 성당을 습관적으로 다니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자 제 삶의 이유에 대한 질문이 된다. ‘성당에 다니는 나는 누구인가?’, ‘신앙이 삶의 생명수처럼 달고 시원한가?’....

▲ 그리스도의 승천, 렘브란트(이미지 출처 = wikiart.org)
오늘 기념하는 예수의 승천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작은 끝을 불러오며 끝을 갈망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게 시작이다. 하여, 승천은 예루살렘에서의 탈출이다. 본디 중요하다는 것에서의 탈출, 이러해야 한다는 것에서의 탈출, 이랬으면 한다는 것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낯설고 힘든 길임에는 틀림없다. 제 껍데기를 벗겨내는 게, 어찌 힘이 들지 않겠나. 속살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속내를 숨기느라 오랜 시간 껍데기와 하나된 채, 본디 제 모습이 무언지 몰라 벗겨내야 할 게 무언지도 모르는 무지함에 더 힘들 테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그 본디 모습을 잃어버렸다.(창세 3장 참조) 그래서 ‘가죽옷’을 입어야만 했다. 행여 다칠세라, 본래의 살을 감춰야만 했다. 서로에 대한 탐욕, 불신, 원망, 질투가 가죽옷을 더 두껍게, 더 단단히 껴입게 했다. 제 삶이 무언지도 모른 채, 인간은 그렇게 오랜 시간 인간 아니게 인간인듯 살았다. 예수의 승천은 이 가죽옷을 벗기는 것이다. 인간이 제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가죽옷으로 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어리석음과 가죽옷으로 서로를 밀쳐 낸 미움을 용서하며 사는 것이다. (용서는 예수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태 1,21 참조).

‘왜 예루살렘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대단한 묵상이나 특별한 깨우침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왜 사는가?’, ‘인간이라면 본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인간 삶에 대한 당연하고 단순한 고민으로 얻어진다. 그 답이 어려운 건, 여전히 나는 나로서 살지 못하고 나를 둘러싼 껍데기로 살기 때문이다. 나로부터의 해방이 나의 완성이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예수는 승천을 통해 가르친다. 나인 듯 사는 남이 나이기만 한 현실에 예수는 여전히 승천 중이(어야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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