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5월 1일(부활 제6주일) 요한 14, 23-29

어버이연합이 시끄럽다. 오래전부터 시끄러웠으나 이번엔 색다르게 시끄럽다. 난잡한 시끄러움에 괜스레 슬픔이 울컥 치민다. 어버이.... 가슴 따뜻하게 부르고픈, 어버이.... 어버이는 있되 자녀들은 그 어버이 앞에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한다.

어버이연합이 문제라고 세상이 떠들어 대는데, 나까지 거들고 싶진 않다. 다만, 이번 일에 숨겨진 듯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언론의 민얼굴은 굳이 짚어 보고 싶다.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의 기자회견장, 질문에 답을 마다하는 사무총장을 향해 기자들은 거칠게 항의한다. 기자로서 당연할 일.... 그런데 말이다. 그 기자들의 무리는 청와대의 박근혜 대통령 앞에선 어떠했는지, 따져 묻는 모습이었는지, 숨죽이며 ‘하사하신 말씀’에 부복하듯 머리를 조아렸는지.... 언론의 민얼굴은 하나인 듯하나 실은 둘이었다.

요한 복음에서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은 하나이며 그 하나는 일관된 의지 안에 하나이다.(요한 13,16;1; 코린 15,27-28; 에페 1,3-14 참조) 파견된 아들은 파견한 아버지의 말을 전하고 그 뜻을 지켜내는 데 일생을 보냈다. 이 세상에 투신했고, 투신은 아팠고, 아프다 못해 죽기까지 했다. 아프다고, 힘겹다고 비켜가지 않은 인간 예수는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와 하나이길 원한다. 예수와의 하나는 ‘온화한 미소와 품격있는 교양’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아프다고, 힘겹다고 비켜가지 않는 우리의 투신이 예수와 하나 되게 한다. 요한 복음은 이 투신을 사랑이라 한다.

▲ 산상 설교, 칼 블로치(이미지 출처 = wikiart.org)
성령은 이 투신을 증거하고 깨우쳐 준다. 성령은 아들 예수의 투신을, 우리의 투신을 일관되게 지켜내는 보호자며, 깨우치는 스승이다.(요한 16,13-15; 루카 24,13 이하 참조) 세상이 시끄러워도, 세상이 두려워도 성령은 우리를 부추긴다.(요한 20,19 참조)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지도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성령은 예수의 투신을 우리를 통해 지금, 여기에 다시 살려내고 각인시킨다.

대개의 신자는 성당에 와서 평화를 얻고자 한다. 대개의 신자가 되뇌는 평화는 한 단어이되, 그 의미는 두 개로 갈라져 극을 이룬다. 세상은 평화를 ‘자신 안에서’ 찾고, 예수는 평화를 ‘타인 안에서’ 찾는다. 행여, 세상으로부터의 탈피로 평화를 갈망한다면, 그 평화는 예수의 평화와 멀다. 예수와 멀기에 하느님과 멀고, 그 거리감에 성령은 온데간데없다. 하여,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고 흔들리며 무너져 내린다. 하느님을 찾지만 실은 나를 찾기 때문이다. 성당에 가면 갈수록 늘 외로운 이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상에 한 발 내딛는 것이 신앙이고 평화며 사랑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는 민중 속에 부대끼며 살았다. 그런 예수를 일관되게 따르려고 성당에 간다. 어설프게 믿으면 세상이 두렵고 두렵기에 피한다. 피한 것이 부끄러워 세상에 초탈한 듯, 도사 흉내 내는 가식을 떤다. 제대로 믿으면 세상이 두려워도 세상에 한번 대들어 볼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면 대들 일이 셀 수 없이 많다. 한번 대들어 보는 인생, 그게 신앙이고 평화며 사랑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무식한 철부지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신다.(마태 11,25 참조)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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