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17일(부활 제4주일 ) 요한 10,27-30

총선이 있었고 내가 지지한 정당은 참패했다. 굳이 돌이켜 보자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늘 참패였다. 부끄럽게도 그 정당에 대해 나는 늘 침묵했다.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헛웃음을 보였으니까.... 현실적인 정당이 아니라고 말들했으니까....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그를 따라간다. 목자의 목소리는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그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것은 전적으로 양의 몫이다.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려 이 세상에 파견되었고, 이 세상에서 죽어 간 것이 목자를 따르는 양의 모범적 모습이다.(요한5,30 참조) 아버지는 보내시는 것으로, 아들은 그 보내심에 자신을 내어 바치는 것으로 서로의 몫을 다했다. 예수는 지금 우리 신자들 역시 자신처럼 그렇게 따르고 죽어 가길 바란다. 예수가 아버지를 따랐듯이 우리 신자들 역시 예수를 따르길 바란다. 예수는 우리를 부르는 것으로,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서로의 몫을 다할 것이다.

▲ 제20대 국회의원선거 전, 합정역 부근의 풍경. ⓒ지금여기 자료사진

아버지와 하나라며 선포한 예수의 자기 정체성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가 지향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하나’라는 그리스어는 남성이 아니라 중성 형용사가 사용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 일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지향하는 바의 하나됨을 가리킨다)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바친 아들 예수의 뜻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요한 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리 신앙인 역시 하나이길 원한다.(요한 17,22 참조)

서로의 뜻이 하나되는 것은 서로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상식이다. 신앙이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건, 하느님 뜻을 살피는 데 게으를 때 그렇다. 세상의 숱한 표징적 사건들, 그 사건들을 굳이 뭉뚱그려 때려 넣는 양비론적 프레임에 쓸데없는 수다를 떠는 데는 시간을 낭비하면서 신앙적 가치들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게 다반사다. 한참 재밌는데 굳이 신앙적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며 눈흘김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여당이니 야당이니, 진보니 보수니 일컫는 모든 프레임의 난잡함은 잠시 조용해졌다. 총선이 끝났으니까.... 하지만 예수를 목자로 둔 신앙인은 지칠 줄 모르는 행군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 머물며 목자를 따른다는 건 기만이다.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한 뚜렷한 목표나 지향점은 제 삶에 대한 반성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제 삶이 이웃과 사회와 늘 결부되어 있으니 나 하나 반성한다고 끝나는 게 신앙인의 모범적 삶은 아닐 테다. 예수가 이 세상에 육화해서 왔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상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은 남을 걱정하고 남과의 관계 설정을 고민하는 것으로 제 삶을 살겠다며 맹세한 이다.

내가 지지한 정당이 내놓은 이번 총선 공약은 우리 교회에서 세상을 사랑하며 내놓은 각종 가르침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지지했다. 그런데 아직 웃음 수준의 미약한 지지율로 총선을 마쳤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지지한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과 닮았으니까. 그 가르침이 예수를 목자로 둔 양들이 듣고 따라야 하는 목소리니까.... 다음 선거가 또 기다려진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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