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10일(부활 제3주일 ) 요한21,1-14

예수는 없다. 죽었고 부활했다 하지만,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그래서 믿을 수 없다.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물론 우리 이야기일 수도 있다) 1세기 말엽, 요한 복음이 전해졌던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다.

예수를 알고 그를 믿는다는 건, 그의 가르침을 적당히 따르며 삶의 지혜 정도로, 그의 몇몇 말이나 말씨를 그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다.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은 인간 한계 너머의 일이다. 그래서 삶이 바뀌는 일이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제 삶을 바꾸거나 버리지 못하는 이는 제 삶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요한 6,66 참조) 오늘 복음에 나타난 어부들은 제 삶을 뛰어넘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한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어부는 어부로서 제 일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부이되 어부임이 부질없이 돼 버렸다. 이른 아침 나타난 예수는 다시 그물을 던지게 한다. 물론 고기는 많았다. 대개 예수 덕에 엄청난 고기를 잡아 올렸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예수 만나면 저리 풍요롭고 부(富)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은근히 즐기듯 소망한다. 허나, 다시 짚어 보자.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어부는 어부다. 고기 잡는 전문가에게 고기를 다시 잡아 보라고 다그치는 예수에게 괜스레 ‘뭐야?”, 싶다.

여기엔 말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숨어 있다.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는 논리, ‘나 중심적 논리와 관점’을 뛰어넘는 일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물을 다시 던진다. 엄청난 고기는 예수의 말을 따른 결과다.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된 요한 복음 2장의 이야기에서도 같은 논리를 발견한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거리를 유지한다. 자신의 때가 아니라며 예수는 거부한다. 이에 마리아는 종들에게 예수의 ‘말’을 들으라 부탁한다. 말에 대한 경청과 실천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데 전제 조건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의 거부 때문에 마음을 접고, 등을 돌렸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렀을까? 포도주는커녕 예수든 마리아든 혼인잔치의 뒤편으로 잊혀져 갔을 테다.

그물을 던지라고 말한 예수가 ‘주님’임을 깨달은 베드로는 물에 뛰어 들었다. 돌발적 행동이었으나 당연한 행동이다. 제 전문성이, 제 앎이, 제 경험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 대개의 경우 부끄러워 숨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와의 아침 식사는 이어진다. 식사야 별 다를 바 없다. 다만, 예수의 식사는 공동 작업으로 가능하다. 고기를 잡으라 한 예수의 말과 고기를 잡은 제자들의 행동, 그리고 예수가 준비한 빵과 제자들이 가져 온 물고기가 만나 어우러지는 만찬이다.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이 앎을 이끌어 낸다. 지식이나 지혜의 일방적 흐름은 예수를 이해하고 믿는 데 적합하지 않다.(루카 24,30-31 참조) 예수더러 모든 걸 해 내라는 식, 예수를 믿으면 모든 앎과 지혜가 거저 주어질 거라는 태도는 신앙하는 데 매우 위험하다. 예수는 무슨 일을 하든 딱 반만큼 한다. 나머지 반은 우리를 통해 이루려 한다. 반쪽을 그냥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내 것을 모두 접고 그의 반을 위해 내가 무엇을 보태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 일상에 늘 놓여 있다.

이 문제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통해 제 삶의 가치를 담아내는 ‘사랑’의 문제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물은 사랑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배반한 일에 대한 회개(돌아섬)의 디딤돌이다. 사랑을 통해, 사랑 위에 하느님 백성은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세련되어질 것이다. 그 하느님 백성이 예수와 베드로 사이에 형성된 사랑의 열매다.

예수는 여전히 없다. 여전히 만져지지 않는다. 다만 그 예수의 열매인 우리 신앙인은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있다. 여전히 느껴지고 만져지며 알게 된다. 우리 신앙인이 서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나눔에서 말이다. 

 (사진 출처 = www.flickr.com)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