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3월 27일(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일상의 관성을 극복하는 것이 부활일까? 복음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이다. 이유인즉, 복음의 시간적 배경에 유독 눈길이 가기 때문이다. 주간 첫날, 파스카 축제는 지났다. 이제 쉼에서 노동으로, 축제에서 일상으로 시간은 바뀌었다. 다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 시간의 의미는 달랐다. 노동의 시간이, 일상의 시간이 이전 것과는 매우 달랐다. 이른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무덤으로 간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녀가 목격한 건 ‘부재’다. 예수도, 주검도, 부활도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대개의 주석 학자들은 빈 무덤의 표징을 예수 부활의 징표로 이해한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전례 안에서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데 빈 무덤은 소용되었다고 말들 한다. 예수의 부활이 살덩이나 세포조직의 재생 정도로 기술되는 대목은 복음서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 사건은 보인 것이 아니라 고백된 사실이다. 부활 사건은 그 사건을 체험한 이들로부터 전해지는 해석과 신앙으로 고백되고 증거된다. 그리고 부활을 전해 들은 이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빈 무덤’에서 또다시 부활을 증거하는 데 초대된다.

▲ '부활 축체', 니코 피로스마니.(1906)

부활은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주간 첫날’은 십자가 죽음 뒤 삼일째가 되는 완성의 시간을 표현하기보다 일상의 노동과 삶의 무게가 시작된다는 측면을 강조한다. 세속을 떠나 일상의 시간 흐름을 끊어 내는 데서 부활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일상의 팍팍함이 시작되는 ‘주간 첫날’ 부활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낸다. 그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부재, 딱 거기까지 고백한다. 일상을 초월한 신비 체험으로서의 부활에 대해 요한 복음은 각별히 조심한다. 일상을 새롭게 살아야 할 시간에 일상을 파고든다. 거기에 요한 복음은 ‘빈 무덤’을 던져 놓는다.

첫날은 둘째 날, 셋째 날을 불러온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첫 번째 열매’로 인식되고 그 열매가 그를 믿는 이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길 바라듯,(1코린 15,23 참조) 첫날은 앞으로 펼쳐질 시간의 무한한 가능태를 그려 낸다. 규정될 수 없는, 끊이지 않는 시간들 속에 무엇이 채워질지, 무엇이 주어질지 우린 모른다. 모든 것이 비어 있고, 비어 있어 신비롭고 설렌다. 부활을 쉬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이 그러했다. 보이지 않는 주님, 부활하셨다고 전해 들은 주님, 그들에게 주님은 규정될 수 없는 비움 자체였고 거기서 그들은 의심하면서 신앙했다. 첫날은 그렇게 무수히 많은 의심과 신앙 사이에서 늘 ‘오래된 미래’였다.

예수로부터 사랑받았던 제자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대변한다. 제자는 부재의 자리를 쳐다본다. 본 것은 죽음의 흔적이었으나 주검은 없었다. 흔적은 흔적으로 남겨 둔다. 먼저 갔으되, 먼저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받던 제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가까이 느꼈고 따랐던 이다. 예수의 심문 과정에 가장 가까이 있었고,(요한 18,15-16 참조) 예수의 부활을 깨달은 자다.(요한 21,7 참조) 그럼에도 그는 비움의 자리를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둔다. 겨우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만 확인한다. 이어진 베드로의 등장 역시 별다른 게 없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 안에 부활의 복음을 처음 접하는 인물이다.(마르 16,7; 루카 24,34; 1코린 15,5 참조) 또한 베드로는 예수를 대신해 죽을 것이라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으나,(요한 13,37 참조)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존재이기도 하다.(요한 19,17-27 참조) 베드로가 본 것은 예수의 주검도, 부활도 아닌 죽음의 흔적이었다. 빈 무덤에서 비어 있음을 체험하는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사랑받던 제자는 보고 믿었다. 무엇을 믿었을까? 예수의 부활을? 그러나 그들은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요한은 또한 전한다.(요한 20,9 참조)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성경말씀을 시편 16장 10절의 말씀이라고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믿음은 시작되었으되 채워지지 않았다. 부활을 믿었는지, 예수의 부재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사랑받던 제자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그는 믿었고, 우리 역시 20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가 믿은 것을 이어 받고 이어 준다. 다만, 확실한 것 없고, 규정될 것 없이 그렇게 어렴풋이 주님의 부재 속에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을 뿐이다.

부활은 그러므로 지나간 과거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축하할 일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신앙인들의 믿음 안에서 묵상되고 되살아난다. 2000년 전 일상을 파고들었던 부활 사건이, 오늘 특별할 것 없는 우리의 일상 안에 새롭게 파고들어, 살아 있는 게, 살아가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사색하게 한다. 빈 무덤의 비움이, 제자들의 주저함이 오히려 필요하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신념과 일상의 관성, 거기서 반복되는 영혼 없는 축하는 부활을 기억할 뿐 살려 내지는 못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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