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3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요한 20,19-31

주간 첫날,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는 날, 그날 제자들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세상으로부터 유폐된 제자들이었다. 예수는 이 단절을 넘어선다. 예수가 넘어 선 것은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세상으로부터 유폐된,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거나 제거된다는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이유인즉, 예수가 ‘평화’를 빌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샬롬)를 비는 인사는 유대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축복을 비는 인사다. 이를테면, 예수는 지금 하느님이 함께 있음을 제자들에게 일러 주고 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비난과 폭력에 죽음으로 맞선 하느님, 그러나 기어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하느님이 지금 제자들 사이에 ‘서’ 있다.

예수의 평화는 죽음이 제거된, 죽음과 대립된 무릉도원의 안온함이 아니다. 죽음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채 죽음의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떳떳한 평화다. 예수는 신비로운 몸으로 나타난 게 아니다. 죽음과 생명의 연결선 상에서 예수는 평화를 빌고 있다.

평화의 인사가 취하는 논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인간이 이어받는 창세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창세 2,7 참조) 진흙의 무생물이 생명의 존엄함을 취하는 데 하느님의 숨은 필수적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죽음이었으나 하느님으로 인해 생명이다. 인간인 예수는 그 죽음을 통해 인간이었고, 부활을 통해 하느님이다. 예수는 죽음과 생명을 연결한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토마스는 인간이다. 참으로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하느님일 수 없고, 그래서 죽음의 흔적만을 더듬는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예수를 만지고 싶었다. 예수의 상처를, 그 상처가 죽음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사실 토마스는 예수와 죽을 수 있다는 결기를 드러낸 인물이었다.(요한 11,16 참조) 죽음을 불사하는 결기는 때론 인간의 한계를 더욱 견고케 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면역 체계일 때가 있다. 뜻한 바를 이룬다는 영웅적 자세일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스스로를 기존 삶의 태도나 양식 안에 가두어 버린다. 빛이라고 해도, 생명이라고 해도, 부활이라고 해도 토마스는 예수가 죽는다고, 이제 끝이라고 단정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물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토마스에게 나타난 예수는 먼저 죽음의 흔적으로 다가선다. 죽음이냐, 부활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토마스가 예수를 예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토마스는 죽음의 흔적에서 믿음을 고백한다. 토마스가 믿은 건 죽음과 대비된 부활이 아니다. 토마스에게 믿음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다. 부활을 하셨건, 죽어 가셨건, 이 땅에 오셨건, 저 하늘에 계시건, 토마스에게 예수는 마냥 주님이고 하느님이다. 토마스의 믿음은 인간의 한계를 온전히 받아 낸 예수를 통해 인간 너머의 것을 볼 줄 알고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대개 인간은, 인간이란 보고픈 것을 보고 듣고픈 것을 듣는다는 사실에 둔감하거나 이것을 외면한다. 모든 것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듣는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신념이나 관점에 갇힌 채 주관을 객관으로 꾸며대는 데 노련하다. 하여 토마스는 새로운 인간이다. 보고픈 것을, 듣고픈 것을 내려놓고 ‘주님, 하느님’이라며 새로운 것을 보고 듣는다. 하여 토마스가 부럽다. 참 많이도 부럽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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