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한 번 더 해피엔딩"

지상파 드라마가 위기라는 것은, 지상파 드라마 관계자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들어지는 관행과 습성이 틀에 박힌 듯이 이미 움직일 수 없게 정해져 버린 채 흘러가는 데다, 갈수록 제작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시선과 목소리의 영향력에 대본 자체가 좌우된다는 인상마저 준다. 인기가 좀 있다 싶으면 더 끌어올리기 위해, 시청률이 낮다 싶으면 반등시키기 위해 어떤 입김이 작용하는 느낌이다.

물론 텔레비전 드라마 특히 지상파의 특성상, 여러 가지 작품 외적 요인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시청자가 그 정도로 옹졸하지는 않다. 다만 정도가 지나친 경우, 이를테면 초반의 설정과 캐릭터 등이 터무니없이 변해 버리는 경우를 만날 때는 이게 정말 제작진의 의도일까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 송수혁(정경호 분)과 한미모(장나라 분)(왼쪽), 구해준(권율 분)과 한미모(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지상파가 요즘 더 어려워진 것은 채널이 워낙 다양해진 데다 케이블 채널 <tvN>이 연속적으로 히트작을 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시청자의 취향이 어느새 그런 새로운 풍의 드라마에 맞춰져 가고 있기도 하다. “응답하라 1988”과 “치즈 인 더 트랩”, “시그널” 같은 지상파에서는 사실상 시도하기 어려울 듯한 드라마들이 장안의 화제다. 드라마를 고르는 입맛은 이미 바뀌었거나 곧 바뀌게 될 것이다.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 중에는, 처음 보는 무명의 신인이 극중 주요 배역으로 떠오르고 어느 날 갑자기 스타도 될 수 있고 심지어 극의 흐름마저 바꿀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름값이 배역의 비중과 향후 줄거리를 결정하는 일은 없었다. 주인공이 따로 없고, 어쩌면 누구라도 주인공이 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을 보는 기쁨도 신선한 재미였다. 시청자들이 간절히 바란다면, 극의 방향은 완전히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은 유동적인 전개다.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시청자들은 그저 하나의 드라마를 보았을 뿐인데, 연예계의 대세와 판도까지 바꿔 놓고 말았으니 말이다.

<MBC> 수목 미니시리즈 “한 번 더 해피엔딩”은 로맨틱 코미디의 달인들이 포진한 드라마다. 처음에는 정말 재미있었다고 다들 입을 모은다. 초반 전개가 하도 빨라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연애와 결혼과 재혼에 대한 새롭고 색다른 이야기를 어쩌면 보여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도 주었던 게 사실이다. 한껏 망가져 가며 능청스러운 연기로 웃음을 주던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 걸그룹 엔젤스의 멤버. (왼쪽부터) 한미모(장나라 분), 고동미(유인나 분), 백다정(유다인 분), 홍애란(서인영 분).(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걸그룹 엔젤스의 전 멤버 한미모(장나라 분)는 현재 재혼 전문 결혼정보회사 공동대표다. 한미모와 초등동창이자 연예지 매스펀치의 기자 송수혁(정경호 분)의 ‘재회’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엉뚱했지만 재미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둘이 연애하는 이야기로 귀결될 것 같은 지금과는 관전 포인트가 달랐다. 하루 만에 키스와 프러포즈, 심지어 혼인 신고까지 그것도 술에 취한 김에 일사천리로 다 해버릴 뻔 했던 이 남녀가 초반에 소동을 피울 때는 어디까지나 해프닝의 가능성이 있었다. 한 번씩의 종결된 결혼 경력을 갖고 있는 남녀가 온갖 유치한 실수들 끝에 겨우 주민센터 직원의 사명감으로 ‘미신고’로 소동을 마무리했고, 그날 남자 쪽에서 ‘증인’으로 불렀던 친구 구해준(권율 분)의 현명한 판단과 개입도 있었다. 알고 보니 서로 앞집에 살고 있었으며, 이후 응급실에 실려 갔던 한미모는 구해준에게 한눈에 반해 사귀기에 이른다.

문제는 시청자들이 초반에 재미를 느낀 부분은 점차 분량이 줄어들고, 결국은 ‘누가 주인공인지’를 강하게 주입시키고자 하는 줄거리와 러브라인 위주로 흐른다는 점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시청자들이 ‘주인공’이 아닌 남자 배우에게 행여 몰입하게 될까 봐 그의 성격이나 행동을 호감을 얻기 어려운 쪽으로 몰아간다는 느낌이다. ‘주인공’이어야 하는 더 지명도 높은 배우를 위해, 그가 부각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주인공’들조차 이제는 초반의 자유분방함과 매력을 잃어 간다는 것이다. 뭔가가 의도적으로 정해졌을 때의 경직성인 듯하다. 이렇게 스토리가 정해진 게 시청자 눈에도 보일 정도니, 실상 이야기는 뻔해진 셈이다. 심지어 모든 등장인물들도 어느 순간부터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정해진 패턴과 결말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 같다.

본래의 분위기 혹은 원래 하려던 이야기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면, 시청자는 일단 어리둥절해진다. 한창 빠져들어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가,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하면 시청률이 오르겠지?’ 혹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안 볼 거야?’식의 강요나 강압으로 느껴지면 재미가 뚝 떨어진다. 처음에 흥미진진하게 봐 주었다고 해서, 캐릭터나 줄거리가 ‘이상하게’ 바뀌어도 계속 볼 리는 없다. 기대대로 전개되지 않으면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아예 끈다. 종일 TV를 켜 놓거나 한번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줄거리가 궁금해서라도 끝까지 시청하던 과거의 시청자들과는 다르다. 말로는 시청률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만, 현재 지상파 드라마에서 가장 배려하지 않는 것은 시청자가 아닌가 싶다. 보든 안 보든, 어떤 고집대로 끌고 간다. 작품을 이끄는 더 중요한 원리라도 있는 것일까.

 
 
김원(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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