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과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 아니 미래를 바꾸면 과거가 바뀐다. 시제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는 불변의 서사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 따라 재편되고 심지어 생사여탈도 새로이 결정될 수 있었다. 서로 맞물려 있는 과거-현재-미래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그 한끝의 한 지점만 달라져도, 파장은 무늬 전체를 바꿀 수 있다.

어느새 우리의 간절함은, 여기까지 왔다. 시간마저 뛰어넘어 버리는, 아니 시간 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 안에서 다시 소멸부터 생성과 변화를 스스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이야기가 드라마의 형태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지난 주 시작한 <tvN> 금토 드라마 ‘시그널’이다.

▲ (왼쪽부터) 차수현(김혜수 분), 박해영(이제훈 분), 이재한(조진웅 분).(사진 출처 = tvN 홈페이지 갈무리)

드라마 ‘시그널’은 2015년 현재 시점의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 분)과 1980년대 강력계 형사 이재한(조진웅 분)이 구식 무전기를 매개로 무전을 통해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인물이 15년 경력의 베테랑 형사 차수현(김혜수 분)이다. 드라마 속 사건들은, 대한민국 전체를 분노와 공포에 떨게 했던 아주 유명한 미제사건들이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유’조차 가늠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 연인원 수만 명을 동원해 ‘총력’을 다해 수사하고 있다는 경찰의 셀 수 없이 많았던 브리핑은 시민들의 기억에 생생하지만, 지금 와서 밝혀진 건 초동수사부터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한 뒤늦은 일화들이다. 심지어 공소시효라는 이름의 법적 장치까지 만료되어, 이제 ‘왜?’라는 의문도 ‘누가?’라는 분노도 먼지 쌓인 수사 파일로 돌아가 버린 비극들이다.

‘경기남부 연쇄 살인’의 경우, 현실의 용의자는 3000명이었다. 몰상식을 넘어 터무니없는 숫자다. 드라마 속에도 잠깐 스피드 퀴즈 훑듯이 지나가는 얼굴 식별 장면이 등장한다. 이런 식의 ‘수사’는 당시 사회와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함 탓도 있겠지만, 제작진은 여기에 특별한 이유를 더 붙였다. 간절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하늘에 닿을 듯한 간절함으로 끝까지 이 문제에 매달렸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이 드라마는 그런 의문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가려 한다. 피해자와 유가족들 말고도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를 걸고 함께 끝내 울어 주었다면, 사건의 전개 양상도 결과도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 그 간절하게 매달린 이가 과거에도 한 명, 현재에도 한 명 혹은 그 이상 버티고 있었다면 결국 미제사건 속의 범인 추적은 물론 사건 자체가 발생한 그 시각 그 자리까지도 새로이 재배치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과거 사건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해석뿐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 버린 상상력이었다. 과거 현장에 ‘존재’하고 있는 이의 생생한 증언과, 현재 단계에서의 ‘과학수사’와 프로파일링을 통한 추정 그리고 이미 결과로 나와 있는 뉴스들의 정보력이 한 데 얽혀 ‘가야 할 곳’과 ‘찾아야 할 사람’에게로 정확히 향한다. 과거에서 소환된 단서들이, 현재의 막강한 정보력의 도움에 힘입어 다시 과거로 되돌려진다. 그리고 살인사건 자체를 막는다. 미래가 바뀐 것이다. 입이 딱 벌어질 일이었다.

사망자를 ‘생존자’로 바꾸기 위해 흐릿해지고 파동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새로운 ‘현재’를 찾아 내는 사건현장 사진 및 증거 자료들과 칠판의 메모들. 어떤 한 생명이 죽다 살아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불현듯 눈물이 나려 했다. 그 어떤 희생자도 살인사건도 ‘시효’를 핑계로 잊히거나 덮여서는 안 된다. 극 중 이재한 형사의 말 “세상에 묻어도 될 범죄는 없다”는 외침이 마음을 울린다. 그렇다. 사람을 죽였는데 합법적 시효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고, 억울한 이들의 한을 푸는 일에 시간의 장벽마저도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알고 나면 때로 눈물 밖에 나오지 않는 아픈 과거들에 대해, 이제 우리는 상상력의 힘이라도 빌려 응답해야 한다. 지금 바라보는 눈이 바뀌면, 미래가 바뀐다.

 
 

김원(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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