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종교가 신자들에게 해야 하는 역할 중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위로와 격려를 주는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속풀이의 질문은 종교의 그와 같은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질문을 하신 분께 되묻고 싶습니다. 어떤 양상을 뜻하는 '마음의 평화'를 원하시나요?

신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알리는 평화의 기준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내게만 주어진 평화가 아니요, 그것은 우선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평화입니다. 그거 마음에 안 드니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습니다.

▲ 피정을 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 ⓒ지금여기 자료사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적 심성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고대로부터 무속을 시작으로, 불교, 그리스도교 등을 알아 왔습니다. 즉, 우리는 인간의 능력과 그들만이 이루는 세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존재와, 불변하며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그 존재에 기대려는 경향을 다른 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 인구에 대한 통계자료를 참고해 보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한 사람들이 나라 전체 인구의 절반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통계이니 그 사이 좀 더 늘거나 줄거나 했을 것을 감안하더라도 국민의 절반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설령 자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정의 배경은 어떤 특정 종교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렇듯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자기를 신앙으로 이끌어 줄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셈입니다.

아무튼 아무런 신앙도 없는 사람보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 혹은 신앙과 가까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을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오늘의 주제인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가톨릭 신앙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묻는 어떤 설문에서도 이런 답변이 가장 많이 나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말하는 '마음의 평화'라는 것을 좀 더 꼼꼼하게 따져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하시는 평화라기보다는 실제적 삶의 평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나 장애물이 없는 그런 상태. 불편함이 정리된 쾌적함.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건강과 부를 바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 '평화'라는 낱말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믿으면 복을 얻는다는 공식이 암암리에 우리의 종교적 심성에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기복적 수준의 신앙이지만 실제로는 기초적인 단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단계의 신앙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노력이 이어져야 함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신앙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며 이웃에 봉사하는 분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마음의 평화'를 구하시는 분들은 그 평화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잘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들에게 그 평화는 세상이 겪고 있는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임마누엘)는 것을 앎으로써 누리게 되는 평화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 43,1-2)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종교는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이 종교에 소속된 성직자들은 문제의 해결사가 아닙니다. 단지 신자들과 절대자를 연결시켜 주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용기와 위로를 주는 이들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이 되셨는데 나는 정작 안락함을 바라다니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명확히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길 바랐던 것이며, 우리와 함께 인간과 생태가 겪는 온갖 문제를 함께 풀어 가고자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 없이 물과 불을 건너갑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그리스도는 우리 주변의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처럼 떠돌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라고 끊임없이 초대하십니다.

어떤 이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청할 때, 교회는 그에게 묻습니다. 신앙이 그에게 무엇을 주느냐고. 그는 대답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사실 마음의 평화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대에 끊임없이 응함으로써 평화를 완성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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