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22]

1. 얼마 전 친한 목사님에게 목회 세습에 대해 묻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때 ‘그 많은 신자들이 세습이 문제인 줄 알면서 어찌 그리 침묵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 목사님은 ‘사실 신자들은 누가 목회자가 되건 크게 관심이 없다. 어느 목회자든 몇 년 지나면 다 비슷해 신자들은 자신들끼리 맺는 관계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나에겐 아리송한 답이었지만 이 말 때문에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과연 천주교 신자들은 왜 성당에 다닐까?’였다.

2. 재작년까지 무슨 뉴스 거리만 생기면 나한테 전화를 하는 칠십대 신자 분이 있었다. 오래전 다른 일로 알게 된 분이었는데 본당 신부님이 주일날 강론 중에 사회문제를 이야기한 다음이면 어김없었다. 대체로 ‘신부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그분의 병이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아마 그분과 마지막 통화 때였던 것 같은데, 자신은 신부님과 생각이 달라 몹시 불편함에도 그동안 자기가 지켜 온 신앙 때문에 성당에 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앙이 신부님보다 더 정통적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제들은 신학과 신앙에는 정통할지 모르나 자기처럼 평신도 전문인들의 영역에는 무지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신자들. ⓒ지금여기 자료사진

3. 보편 교회에서는 교황이, 한국 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의장이 앞장서서 예언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다수의 신자들은 상층부에서 하는 주장, 행동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사제를 하늘같이 모시는 일을 신심의 주요 척도로 여기고 있음에도 유일하게 사회 문제에 대하여만은 냉담한 모습을 보인다. 더 나아가 적대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런 사제들을 아예 양의 탈을 쓴 늑대, 이른바 사제의 탈을 쓴 빨갱이로 간주하며 양심의 부담을 덜려 한다. 그들이 일방적으로 잘못하고 있으므로 자신은 이런 태도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4. 신자들에게 성당에 나오는 이유를 물으면 매우 다양한 답을 들을 수 있다. 답은 크게 몇 가지로 수렴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답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다.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는 일들이 신자들의 삶에서 너무도 다양하니 그만큼 성당에 나오는 이유도 각기 다를 터.

종교학자 정진홍은 종교인들의 신앙 동기를 ‘힘에 대한 숭배’로 보았다. 그에게 힘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오랜 병에 시달리는 신자는 초월적인 힘을 통해 병을 물리치길 바라고, 바늘구멍 같은 시험을 통과하려는 수험생은 이 힘을 통해 자신에게 합격의 길이 열리길 바란다. 어느 종교에 속한 신자들이든 이 힘이 자신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그들이 신앙생활에서 정성을 다하는 이유는 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제는 이를 매개하고 촉진하는 주체이므로 이 힘을 키우는 데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정의니 전쟁반대니 하는 일에 힘을 빼서는 안 된다. 설사 이런 데 관심을 갖더라도 미사(제사)만 정성스럽게 드리면 용서할 수 있다.

이런 동기가 아니어도 종교는 한 개인에게 중요한 준거 집단 역할을 한다. 공동체가 해체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유사 가족을 제공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 준거 집단의 역할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다른 동기가 아니어도 교회에 나올 수 있다. 아마 친구 목사님이 내게 알려 주려 한 답이 이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톨릭 신앙과 무관하게 한국의 전통적인 신심에 기초하여 가톨릭을 포장으로만 이용하는 경우도 더러 발견된다. 성모 신심이 강한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는 이러한 모습은 샤머니즘과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당연히 이들은 예언 직무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런 직무를 사탄에게 놀아나는 일이라 간주한다.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만 복을 가져다 주는, 아니 주어야 하는 신앙이니 말이다.

두려움도 한 몫을 한다. 어렵게 이룬 물질적 성공, 사회적 지위를 지키려면 하느님께 잘 보여야 한다. 적극적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체면치레는 해야 한다.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는 이유, 성당에서 하는 일에 잘 협조하는 이유다. 더 얻지는 못해도, 지킬 수는 있는 방법이니까. 이런 이들에게 이웃 사랑, 정의의 메시지는 가진 것을 빼앗겠다는 주장과 다름이 없다. 이 외에도 그동안 들었던 이유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5. 그럼 예언 직무에 충실하고 동조할 수 있는 신자들은 얼마나 될까? 1980년대 말 교회의 예언 직무가 시들해지기 시작하던 무렵 이런 신자 층의 일부가 교회를 떠나 시민사회단체에 자리를 잡았다. 이전 시대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는 1990년대부터는 이들 신자 층의 다수가 교회를 떠나는 대신 냉담을 선택했다. 그 사이 교회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적은 중산층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부터는 젊은이들의 이탈이 두드러지고, 대신 60대 이상의 입교 러시가 이어지면서 이 신자층이 더 좁아졌다. 그 결과 매일 미사에 소성당을 가득 채우는 성당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런 성당들도 정평위 미사와 같이 사회적 지향을 갖는 미사 때는 자리가 텅텅 빈다. 사제가 아무리 참여를 독려해도 마찬가지다.

6. 이렇게 한국 종교와 한국 천주교회는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천주교 사제들은 상대적으로 신자 층에 비해 나이도 젊고,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편이다. 그러니 다른 종파들에 비해 한 지붕 두 가족의 모습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제들이 신자들의 생각과 문화에 동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엔 과연 사목이 있는가, 아니 가능한가 질문하게 된다. 신자들은 성사만 바랄 뿐 삶의 변화를 바라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 지붕 아래서 계속 엇박자를 내며 살아가는 미래가 불을 보듯 훤하다.

하여 급기야 나는 평소 지론과 다른 말을 하게 되었다. 이런 평신도들이 다수가 되는 게 확실하다면 “차라리 사제 권위주의가 더 낫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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