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9]

이달 19일(2015년 12월 19일) <가톨릭평론>이 ‘깊은 성찰, 열린 대화-한국 가톨릭 신앙인들이 펼치는 소통과 담론’의 기치를 걸고 일 년여 준비 끝에 창간되었다. 필자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는 터라 독자들의 관심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위 주제를 골랐다.

1. 10년도 더 된 일이다. <불교평론>(계간)에 원고를 써 준 일이 있다. 원고료를 준다기에 대신 잡지로 받겠다고 했는데 원고료가 소진된 지 오래되었음에도 아직 책을 보내 주고 있다. 책이 올 때마다 간간이 내용을 살펴보는데 제법 읽을 만한 것들이 있다. 그때마다 신자 수로나 신자 지성인의 규모로나 월등한 천주교에 이런 잡지 하나 없다는 사실에 은근 자존심이 상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가톨릭평론> 준비모임이 일 년 전 출범하였고 나도 자연스레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2. <가톨릭평론>이라는 제호를 정할 때 주변에서 걱정해 주는 분들이 많았다. ‘가톨릭’, ‘천주교’라는 명칭은 인가받은 사립단체나 교구, 주교회의가 설립한 공립단체의 출판물에나 붙이는 것인데 그리 붙였다 제소를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말 교회가 비인가 단체를 불법화하고 해체시켰던 일을 경험한 터라 다소 걱정이 되긴 하였다. 아직 평론의 존재 자체가 교회 안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니 당분간 명칭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할 터.

가끔 제호의 뜻을 묻는 이들에게 나는 ‘가톨릭’이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라 답하고 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지만 나에겐 중요하다. 명사로 사용할 때는 교회의 대표성 여부로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가톨릭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의 형용사 가톨릭은 비신자들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형용사 가톨릭은 가톨릭의 시각으로 교회와 세상사를 바라보겠다는 본지의 지향이 담겨 있다. 평론은 말 그대로 담론을 만드는 일, 담론을 가지고 공론의 장을 펼치는 일, 교회와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 모두를 뜻한다. 부제로 선택한 ‘깊은 성찰, 열린 대화’가 평론의 내용이자 대상이기도 하다. 다만 ‘가톨릭 신앙인들이 펼치는’에 대해서만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사실 이 소통의 장에는 비신자들도 참여해야 한다. 신앙, 종교 여부를 떠나 가톨릭교회를 평론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앙인들이 펼치는’에 따라오는 ‘소통과 담론’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 지난 4월에 열린 조계종의 제4차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 모습.(사진 제공 = 대한불교조계종)
3. 불교계 인터넷 언론 가운데 <불교포커스>가 있다. 필자와 친분이 있는 불교계 지성인들이 만드는 매체라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지난달 이 신문의 데스크에서 자신들이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훼불, 훼종 언론으로 지목받았다는 편지를 받았다.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오면 후원자 이탈로 재정난을 겪게 되니 지지와 도움을 청하는 메일이었다.

여기서 훼불은 불교를 훼손하는 혹은 훼손할 의도가 다분하다는 뜻이다. 훼종은 종단을 훼손 또는 해롭게 할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훼불, 훼종 언론은 한 마디로 불교와 종단 모두에 해로운 언론이라 선언한 셈이다.

평소 이 신문이 불교의 개혁과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기에 집안 일이 아니었음에도 ‘종단의 조치’에 반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불교나 조계종단이 가끔 한국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언론들 덕인데 이들을 단죄하겠다니 이는 불교가 갖는 개방성, 포용성을 포기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왜 남의 집 일에 관심인가 싶지만 이 일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도 어느 교구에서는 ‘찌라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교구에서는 조계종처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훼종 언론이라는 공문을 각 본당에 보내진 않지만 거의 같은 대접을 하고 있다. 일부 교회언론에서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일부 필진의 기고 또는 그에 대한 보도를 막고 있다.

나는 몸에 생채기가 나고, 몸의 주요 부위를 도려내는 아픔을 겪는 한이 있어도 교회가 잘 되려면 그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 언론도 신학자들도 한국교회가 복음에서 벗어나는 행태들을 냉철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교회 쇄신을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교회에 대해 어떤 비판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하면서 교회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자신에 대한 비판을 교회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할 정도로 오버를 한다. 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긴다는 면에서 그들의 애정을 인정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이 이러는 동안 간단한 소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처가 파상풍이 되고, 간단한 수술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치명적인 상태로 될까 염려할 따름이다.

조계종단이나 일부 교구가 비판적 종단 언론에 대응하는 방식이 같기 때문에 <불교포커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이런 언론들이 살아야 교회도 더 건강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기고하고 있고, <가톨릭평론>에 참여하고 있다.

4. 과거에는 교회 이야기가 쉬웠다. 교회 규모, 교회의 역할이 크지 않아 분석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회의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사와 관심영역이 넓어졌고, 지구화되면서 교회의 관계망도 지구적 차원으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도 본당과 교구청의 경계를 넘어 사회 여러 영역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를 테면 사회복지 영역은 2만 명의 종사자(이 가운데 절반은 비신자)가 100만여 명 가까운 대상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당연히 클라이언트 대부분은 신자가 아니다. 의료사업은 남한 의료업계의 1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특수사목이라는 형태로 교회가 관계하는 사람들의 규모와 성분도 다양하다. 교회의 사회정치적 영향력도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커졌다.

사회복지, 의료 분야는 이미 교회의 통제 범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특수사목도 점차 교회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역할 범위가 넓어지면서 통제할 수 없는 영역도 늘어나고 있다. 과거와 같이 사제들이 통제할 수 있는 이른바 조직적 통일성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정치적 측면에서도 권력과 갈등 일변도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 이 시기가 신학적, 교리적 판단을 넘어선 상황임을 보여 준다. 이렇게 영역이 넓어진 교회는 신학만으로 설명과 분석이 불가능하다. 인문학, 사회과학, 때로는 자연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상응하는 전문가들도 많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앙공동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조직체가 되었다.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하다. <가톨릭평론>이 이 차원에 깊이 파고듦으로써 기존 교회 언론과 매체들을 보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5.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 쇄신에 관련된 생각을 신원의 차이를 떠나 자유롭게 소통할 자리가 없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이유는 모두 짐작할 터이다. 어떤 이들은 이 문제의 원인을 사제들의 권위주의 때문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평신도의 수준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우리가 교회 안에 공론장을 만드는 일을 주저하거나 시도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현 상황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복음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현재의 교회 모습은 다음 단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황이다. 한 마디로 미래가 밝지 않다. 그만큼 여전히 남 탓만 하는 상황을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해서 뜻이 있는 이들만이라도 교회가 직면한 상황들에 대하여 신원의 차이를 넘어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해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하면 담론을 생산하여 유포하고 이 담론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야 한다. 이들을 통해 좋은 모범도 만들어야 한다. 교회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에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 다른 종교인과 비종교인들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가톨릭평론>은 우리 자신과 교회가 한국사회와 이 세계 안에 놓인 상황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교회가 직면한 난제들을 풀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6. 가톨릭 사회과학연구회가 있다. 이 단체는 1980년대에 한국의 내로라하는 사회과학자들 수백 명이 이름을 걸고 활동하던 학회였다. 그러던 단체가 현재는 열 명 안팎이 활동하고 있고 그 나마도 연명하는 수준으로 알고 있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그래도 이러한 변화에는 의미가 있다. 과거엔 사회과학을 공부한 신자들의 모임이었다면 현재는 가톨릭 사회교리에 기초하여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에는 세속의 전문가들은 많지만 가톨릭의 시선으로 특히 가톨릭 사회교리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전문가는 매우 적다. 당연히 이 둘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전문가들은 더욱 적다. 사제들도 마찬가지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엔 가톨릭 지성이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평론>은 교회 안팎을 아우를 수 있는 가톨릭 지성을 양성하고, 이들을 발굴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이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데다 최근 교회 내부에서 반지성주의가 확대되고 있다. 꽃을 피워야 할 시기에 과거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급해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성들이 교회에 관심이 없고, 가장 먼저 침묵하며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로나 한국사회로나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가톨릭평론>이 이 지성들을 모으고 그들의 집단 지성을 활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지난 12월 12일 <가톨릭평론> 창간기념회에서 강의하는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와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강한 기자
7. 대부분 창간을 말렸다. 종이잡지가 안 되는 시기에 왜 자살행위를 하느냐는 이유에서였다. 아마 이들의 판단이 옳을지 모른다. 정말 종이책과 잡지가 안 팔리는 시대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앞의 여러 이유들로 창간을 감행하였다. 이렇게라도 교회가 잘 되기를 바랐고, 어떻게든 희망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일 년 뒤에 장렬하게 전사하더라도 하고 싶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말들을 해 보자고 하였다. 비장하지만 난 전사할 잡지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난 아직도 한국의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 가운데 깨어 있는 이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이 힘을 보탤 것이라 믿는다.

독자들에게도 호소하고 싶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도 <가톨릭평론>도 살아남아야 한다. 진보언론이 약화되면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요즘 똑똑히 보고 있다. 내가 속한 교회가 잘 가기를 바라고, 또 그런 교회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기 바란다면 이런 언론들을 살려야 한다. 삼가 구독을 권하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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