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20]

1. 오십이 되었을 때다. 지천명(知天命)의 무게 탓인지 용서를 청하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들었다. 사는 일이 서툴러 알게 모르게 남한테 상처 주었던 일이 후회가 되고 진심으로 뉘우쳐지기도 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생각날 때는 그 사람에게 문자나 메일을 보내 용서를 청하였다. 그러면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별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 그들이 나보다 도량이 넓어 나를 먼저 용서했기 때문일 터.

2. 이런 행동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쩌다 잘못 알고 있었거나 실제 잘 모르는 문제를 몰랐다거나 모른다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르고 나만 아는 잘못도 더러 있는데 이런 일을 먼저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런 일을 인정하면 권위가 약화될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관계에서도 내가 먼저 인정하면 내가 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어떻게든 나의 잘못을 인정하면 이것이 나의 불완전함, 불성실함을 드러내 나의 이미지를 손상시킬까 두려웠다. 많은 경우 버텼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내려놓고 순순히 무지와 실수를 인정하였을 때 상대방은 둘째 치고 내가 자유로워졌다. 상대방으로부터 오히려 권위를 인정받고 더 깊은 신뢰도 받았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4월 16일 교황청과 갈등이 있었던 미국의 LCWR 대표단 수녀들과 바티칸에서 만났다.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3. 가르치는 사람이나 종교 기관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도덕적 기준과 실제 자신이 보여주는 모습 사이의 괴리가 큰 점이다. 사실 종교가 잘못할 수 없다. 종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일 뿐. 허나 종교인 없는 종교가 있을 수 없으니 그 종교인들이 잘못하면 그 종교가 잘못하는 것.

누구나 아는 이 평범한 사실을 그 종교 안에 있는 이들, 특히 그 집단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자주 잊는다. 자신들은 잘못할 수 있어도 자신이 속한 종교는 잘못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일들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잘못을 인정하면 자신이 속한 종교가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로 비쳐질까 두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2000년 대희년 때 가톨릭교회가 그동안의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하였을 때 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놀랍게도 가톨릭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을 표현했다. 이 일이 어렵다는 것을 자신들의 짧은 인생에서 대부분 경험하였던 탓에 그 용기를 높이 샀던 것이다.

한국교회도 대희년 때 한국사에서 저지른 과오들을 에둘러 반성한 적이 있다. 이 역시도 나의 생각일 수 있지만 긍정적인 반향이 컸다. 심지어 이웃 종교인들로부터는 부러움을 샀다. 역시 이러한 행위가 큰 자신감과 용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했기 때문일 터.

4. 2002년에서 2005년 사이 미국 가톨릭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제들의 성 스캔들도 애초에 잘못을 인정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사건이다. 오히려 교회를 더 신뢰했을 것이다.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인들도 처음에 잘못을 인정하면 대체로 관대한 처분을 받는 반면, 부인에 부인을 거듭하다 진실이 드러난 이들은 더 큰 공분을 산다. 공인들에게 엄격한 것이 대중이지만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이에게 너그러운 것도 대중이다. 그들의 삶에 비추어 이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아는 까닭이다.

5. 일본은 전쟁 폭력,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아직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전후에 바로 인정하고 용서를 청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공분을 사진 않았을 터이다. 이렇게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인정 대신 고집을 앞세우게 된다. 상대방의 반응이 거셀수록 그에 비례해 고집도 커진다. 그 결과 피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세월호 사태도 대통령이 사고 뒤 처음 일곱 시간에 대해 애초에 시원히 해명하고, 잘못이었을 경우 겸손히 용서를 청했더라면 지금처럼 문제가 꼬이진 않았을 것이다. 국가 폭력의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국가는 절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갖은 수를 써 잘못을 은폐한다. 병원에서는 의사가, 법조계에서는 검사나 판사가, 대부분의 집단에서 힘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진실을 숨긴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조직이, 자신의 직업이 가진 권위가 지켜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시도가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6. 요즘 인천교구가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앞의 다른 조직들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신뢰의 손상을 가져오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애초에 ‘교구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이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이들로부터 감정을 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제는 본말이 바뀌어 진실은 간 데 없이 그런 일들에 괘씸한 생각만 하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그러나 이는 교회답지 못한 일이다.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밥 먹듯 가르치는 일이 참회와 용서 아닌가? 왜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는가? 신자들에게 참회와 용서를 가르치려면 교구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7. 마침 올해는 자비의 희년이다. 이 자비의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화해(참회)의 성사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체험의 연장에서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한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마치 하느님을 본 듯하게 살아 보라고 강력히 권고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존경을 받는 면 가운데 하나가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모습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켰다고 보는 이들은 드물다. 오히려 그의 권위를 더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 역설을 정확히 이해하면 답은 명료하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8. 다들 영성에 관심이 많고 또 열심히 살려 노력들 하는데 영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 된다. 이 시기를 잘못 선택해 시간을 끌면 문제가 꼬인다. 바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남들은 우리의 고상한 말과 글에 일시적으로 현혹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속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곧 우리의 위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척하지 말자! 척한다고 속지 않는다.” 영성은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비의 희년이 시작되었다. 올해만이라도 교황처럼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을 자주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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