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어 세상으로 9] “그리스도교의 아주 큰 전환”, 프리초프 카프라, D. 슈타인들-라스트, 토머스 매터스 지음, 김재희 옮김, 사이너머 총서 3, 대화문화아카데미, 2014

지난번 기고문에서는 현대의 문을 연 철학자 니체의 안티크리스트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 갔다. 역사의 시계에서 시간의 한 조각을 현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면, 오늘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시간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현대의 중심을 꿰뚫고 들어온 포스트모던의 물결은 현대적 명민함과 추진력을 휩쓸고 갔으니, 그렇게 현대는 찰나의 급물살을 타고 흘러가 버린 것일까. 2016년의 첫 한 달을 지내면서 매일의 시간을 맛보다 보니, 오늘의 시점은 현대 이후, 혹은 21세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를 떠나온 지금의 위치를 표현하는 이 개념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감각을 온전히 담고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로 남는다.

오늘 소개하는 사건은 삼십 년 전인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엘름우드 연구소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시작된다.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비판적 질문’이란 주제 아래 모인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패러다임 전환의 양상에 관해 발표했는데, 흥미롭게도 신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비슷한 성격의 진전이 진행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두 명의 베네딕도회 소속의 신학자와 한 명의 물리학자는 그들의 대화를 계속했고, 그 이야기가 1991년 대담집으로 출판되었다. 그들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등 많은 책을 쓰고 신과학운동을 이끌고 있는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 땅을 가꾸며 명상시를 쓰는 오스트리아 베네딕도회의 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 신부, 힌두교와 불교등 동서양의 종교전통에 관해 깊이 있는 해석을 하는 가말돌리회의 토머스 매터스 신부다. 물리학자와 땅을 일구며 시를 쓰는 수도자가 어떻게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을까? 그들이 공유한 인식의 내용은 무엇일까?

책의 원제목 “Belonging to the Universe”는 ‘우주에 속한다’는 뜻이다.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시대의 흐름 즉,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의 목표, 의미, 방법에 관해 해명하고, 진행되고 있는 패러다임 전환의 성격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분석한 뒤, 이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유방식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에 관해서 성찰했다. 부록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상징인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유럽의회에서 행한 연설문을 실었다.

“패러다임(Paradigm)”은 과학사학자이며 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처음으로 제안한 개념으로, 한 시대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이나 방법, 문제의식 등의 체계를 뜻한다. 시대정신과 그 시대의 사고방식, 생활유형 등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다. 토머스 쿤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이론 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과학혁명의 단적인 예로 제시하고, 이러한 과학 이론의 변화는 어느 한 이론이 그르고 다른 한 이론은 옳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 전체가 갖는 신념과 가치체계가 변화한 것이며, 문제 해결 방법이 달라진 것이라 파악한다.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현대의 표준 모형 역시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참고:https://ko.wikipedia.org/wiki/%ED%8C%A8%EB%9F%AC%EB%8B%A4%EC%9E%84

오늘날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개념은 과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지배적 모델이 더 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예외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모델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대와 현대 이후를 나눌 수 있는 것 역시 현대사회의 성격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리학자, 그리스도교 신학자, 영성가가 공감하는 현대 이후로 전환되는 패러다임의 다섯 변화는 무엇인가?

1. 부분에서 전체로의 패러다임 전환
근대 과학과 신학은 부분의 합으로 전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진리의 역동성을 밝히기 위해서 부분은 전체 안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신은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곧 신의 자기 계시로 드러나는 것을 인식한다.
2.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기본 구조 안에서 역학관계의 과정이 발생하는 것이 근대 과학의 이해방식이었다면, 과정의 역동성 안에서 구조와 역사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3.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적 학문으로의 전환
학문을 하는 주체를 고려하지 않는 객관적 진리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에서, 인식론의 관점에서 과학을 이해하는 것과 함께 비관념적 방식을 포함해서 신학하는 주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4. 건물에서 그물로 전환하는 지식체계
견고한 학문을 위한 기초가 무너지면서, 서로 다른 관점들이 얽히는 관계의 그물이 형성되고 개별적 관점들은 전체적 진리의 형성에 기여한다. 즉, 유일무이하거나 확고불변하는 계층적 위계질서가 없어지는 것이다.
5.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패러다임 전환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데카르트의 방법론, 명제를 통해서 이해하는 아퀴나스의 방법론에서 실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영원한 진리는 전제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근사치와 가설을 수용하는 인식의 유연성을 기반으로 현실을 포함하는 진리의 표현방식에 주목한다.

(사진 출처 = www.pexels.com)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의 실제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것은 서구 역사에서 가장 큰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100년 동안 이룩한 현대문명 덕택에 인간은 우주의 지평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인식의 결과는 신비의 한가운데 놓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태양 역시 우주의 많은 별무리 중에서 은하계라는 한 무리에 속한 별이며, 우주의 지평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지구라는 작은 집에 함께 살면서 우주적 지평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도록 요청받은 것이다. 종교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위치를 고백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앞서는 것은 ‘체험’을 통해 느끼는 영성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직접 만나는 절대적 영적 존재라고 해야 할까. 그러한 내용의 실체를 직접 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뭔가 ‘실천’이 따르는데 실천은 뭐냐 하면, 이러한 영적 체험을 통해 이 세상에서 내 삶을 살아가는 길이 변화하는 것입니다.(43쪽)

종교는 원초적 신비를 체험한 그 영적 체험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인식하면 종교가 형성된 오래된 기원을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곳에서 형성되는 공동체의 성격을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역사적 기원 이전의 우주적 기원에 이르게 되면 이제까지 인식했던 삶의 차원이 달라지고, 종교는 제도가 아니라 모든 것에 스며 있는 삶의 바탕이며 우리는 이미 그 신비 안에서 숨 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원초의 빛을 받아서 빛나며 본래의 결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의 일상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 역시 그 창조에서 뻗어 나오는 빛에 새롭게 비출 때 마치 오래 밀폐되었던 공간에 빛이 들어가듯이 그 실체를 드러내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그 빛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비춰 보면 종교가 되기 이전에 한 특정한 시대에 유대 땅에 살았던 청년 예수를 다시 만나게 된다. 즉, 분명하게 드러난 계시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체험을 다시 지성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제 신학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서 우주적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21세기의 신학은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이미 복음서에서 드러난 우주적 지평을 알아볼 수 있게 된 덕택에 오래된 미래를 회복하는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교의 아주 큰 전환”, 프리초프 카프라, D. 슈타인들-라스트, 토머스 매터스 지음, 김재희 옮김, 사이너머 총서 3, 대화문화아카데미, 2014
우리가 어딘가에 온전히 귀속된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선택된 백성의 공동체를 뜻했고, 그에 비해 오늘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귀속의 체험과 그에 따르는 사회적 실천을 의미합니다.(133쪽)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표현에 관해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내면적 체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정한 변모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은 선물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깊은 내면으로부터 신성이 밝혀지는 독특한 체험에 가까우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체험을 우리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해합니다.(136쪽)

요한 복음 1장의 대서사에서 증언하듯이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을 우주의 지평에서 재조명하고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망에서 창조의 원형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과 인간의 모든 사건들이 우주에 뿌리내리고 있는 창조의 생명 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한 것이고, 역사적 사건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가 모든 역사 안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것을 고백한 것이었다. 내가 숨을 쉬는 순간 열리는 모든 ‘현재’의 순간들은 과거와 미래라는 닫힌 벽을 깨뜨리고 온 우주가 내게 열리는 순간이다. 살아 있는 이 신비의 모든 순간은 우주의 기원에 닿는 시간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기적 같은 순간들을 맞이하며 다양한 관계 안에서 현재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전환되는 패러다임에서 관계 안의 삶은 어떤 성격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성장과 자유는 서로의 활동을 촉진합니다. 무한한 성장과 자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제로섬 게임이 아니거든요.... 어떤 특성이든 주변 환경과의 여러 가지 관계성 안에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관계성이란 꼭 인간한테만 적용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닌 것 같아요.... 인간은 추상적 사고를 통해 지적 능력을 확장시키고 장기적 계획도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졸하게 계산된 행동까지 가능해서 불행하게도 주변을 파괴하고 결국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자유’와 ‘책임’입니다. 추상적 능력은 좋은 데 쓸 수도 있고, 나쁜 데 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고도의 복잡성을 갖게 된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우주를 관념화하는 능력에서 얻어진 자유의 활용방식이지요.(196-198쪽)

인간의 정체성, 우리가 살고 있는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설정하는 것은 결국 신이다. 어떤 신을 섬기는가에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좌표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체험의 궁극적 기준이라고 할 때, 우리는 우주가 곧 신인가? 창조적 에너지가 곧 신인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 그런데 이 대담의 주인공들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신을 가늠한다. 즉, ‘지평선’에 비유해서 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의 시야가 닿는 그 끝에 항상 존재하는 지평선은 결국 존재하는 동시에 가까이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인식차원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를 느낄 때 거기에는 ‘비존재’가 함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존 케이지(1912-92)는 ‘모든 존재는 그것을 받쳐 주는 비존재의 향연’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물을 얽히고설킨 관계의 그물로 보는 패러다임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존재가 그를 제외한 나머지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멩이를 예로 들면, 보통은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지만, 그 배경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보면 그건 바로 대자연, 우주입니다. 그렇다면 신이라고 하는....(202-203쪽)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를 빼고 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신과 우주와의 관계를 빼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지평선으로서의 하느님과 관찰자로서의 인간이 들어와야 합니다. 이 셋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이 신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정신학입니다. 신은 우주의 지평인 동시에 알 수 없는 타자입니다.... 우리는 진정 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존재인 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05-206쪽)

대담이 이루어져 책으로 나온 지 25년이 되었고, 그때 태어난 아기는 25살의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점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당연한 시각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들처럼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에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류공동의 집이라고 강조하였다. 분명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작고 신비한 이 별의 생명체로 살고 있는 인간들은 굉장한 자유를 누리고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교황은 이 지구를 잘 돌보는 것이 바로 자유로운 인간의 책임인 것을 일깨웠다.

오늘, 2016년 1월 29일이란 시점의 실체와 의미를 곱씹으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살아있음의 신비를 호흡하고 우주의 향연에 깊숙이 빠져 볼 일이다.
 

최우혁(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립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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