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마녀사냥을 보는 새로운 시각, 수십만 ‘마녀들’의 처형을 통해 성립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

서양에서 10월 31일은 할로윈 데이, 호박으로 등을 만들어 켜고, 마녀들이 축제를 벌이는 날이다. 그런데 “마녀”, 혹은 “마녀사냥”이란 단어를 들을 때, 그대의 뇌에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첫번째, “마녀사냥”을 검색하면 매주 금요일 밤, 종편 TV의 프로그램이 소개된다. 기획의도를 찾아보니 이렇다: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뒤흔드는 마성의 여자들, 마녀! 마녀들에게 놀아난 무기력한 남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좀 놀아 본 네 명의 남자들이 나선다! 냉소적으로 여자들을 파헤치는 본격 여심 토크 버라이어티!!!”

마녀인 여성들에게 혼쭐난 불쌍한 남자들이 전선을 재정비하고, 다시는 찌질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금요일 늦은 밤에 모여 여성들을 정복할 수 있는 묘안을 짜내며? 수다를 떨겠다는 것이다. 왠지 그 못된 여자들은 젊고 매력적이고, 어설픈 남자들은 그들의 조언을 얻어서 또 다시 마녀들에게 접근해 해보지만, 결국 다시 당하는 것을 놀이 삼아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들린다.

둘째, 실존하는 21세기의 마녀들을 싹쓸이하겠다는 분노를 가지고 “마녀사냥”을 결심하는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여성을 “혐오”하는 나쁜 남자들인데,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하고, 그에 반박하는 여성을 페미니스트, 혹은 메갈리안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여성혐오를 반대하는 개인들의 집합체다. 각 개인 또한 메갈리안으로 불린다) 으로 몰아서 반박한다.

지난 2015년 8월 4일에 방영된 'PD수첩'의 '2030 남성보고서 - 그 남자, 왜 여자에게 등을 돌렸는가' 편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여혐(여성혐오)이 된 너희들을 이해한다’는 군대, 연애, 결혼의 무게에 짓눌린 이 시대의 남성들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십수년 간 혐오를 쏟아낸 주범이기보다는 이해 받아야 할 불쌍한 “시대의 자화상”들이다. 이때 이들을 이해해줘야 할 사람은 그 군대, 연애, 결혼의 무게에서 비껴나 편히 산다고 추측되는 사람들이다. 그걸 이해해주지 못하고 적대로 응하는 메갈리안같은 이들은 세계를 분열시키고 혐오를 생산하는 불온한 세력으로 상정한다. 한국사회에서 여혐들의 활동은 점점 그 수위가 올라가고 있다고 우려된다. 분노지수가 올라가면서 그 폭발 양상 또한 종잡을 수 없다. (참조: http://ko.feminism.wikia.com/wiki/메갈리안)

셋째, 중세 유럽에서 활동했다는 마녀는 어린이 동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코가 뾰족하게 길고 등이 구부러졌으며, 뾰족한 코처럼 길고 까만 모자를 쓰고 까만 옷을 입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늙은 여성의 모습이다. 할로윈 마녀로 불리는 이 모습은 유럽의 고대문명을 이루었던 켈트 족의 전통축제에서 비롯된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에 죽은 이들을 위로하고 이날 지하세계에서 올라오는 악마와 마녀, 각종 유령들을 쫓기 위해서 같은 모습을 하고 축제를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문화 안으로 흡수되어서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11월 1일 전야제를 할로윈 축제로 치루었다.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80232&cid=42836&categoryId=42836)

▲ 할로윈과 마녀 (사진 출처 = torange.us)
“마녀”는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알려졌고,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흥미로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마녀들에 대한 적대감을 실현하는 “마녀사냥”의 역사는 어떨까? 아마도 마녀는 유럽 중세시대에 화형에 처해졌고, 중세가 암흑기로 꼽히는 한 가지 이유가 될 법하다. 왜냐하면, 여성을 육체적 관점에서만 평가하고 악마와 결탁해서 남성들을 골탕먹이는 나쁜 습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정령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마법적인 사회였기에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중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녀사냥” 안에는 “은폐된 진실”이 있다. “마녀들이 악마들과 어울려 놀고, 아이들을 잡아먹고 어른들을 골탕먹인다는 이야기는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을 우선 밝혀야 한다. 그리고 함께 읽을 책을 한권 소개한다.

▲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이탈리아계 미국 여성학자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삼십 년이 넘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마녀사냥”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상상할 수 없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내어 분석하고 드러내 보여준다. 그의 한국어판 서문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신체와 재생산능력을 통제함으로써 자궁이 노동력 생산의 기계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폭력과 야만적인 힘뿐만 아니라, 임금관계의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된 새로운 위계질서와 불평등을 성, 인종, 연령을 따라 도입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임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노동축적과 노동파괴 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10-11쪽)

다시 말해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은 중세가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16세기였으며, 근대의 엔클로저 운동과 데카르트와 홉스의 이성주의를 거치면서 더욱 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집단들, 그 중에서도 늙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근대화되지 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사회까지는 신체가 마법의 힘을 담는 그릇이었고, 그 근거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고 우주를 주술적인 힘으로 채워진 살아있는 유기체로 상상하는 애니미즘의 자연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공감하는 일상을 살아갔다. 자연은 비밀을 간직한 영적인 배경이었고, 여성들의 치유방식인 마법은 행복한 삶을 위한 주요한 열쇠였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체는 노동력의 기반으로서 기계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즉, 이성 중심의 사회에서 마법은 그 힘을 빼앗기고, 마녀들은 사회를 위협하는 대상으로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마녀사냥은 16-17세기에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유럽 전체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여성들을 고문해서 마녀라는 자백을 받아내고, 또 다른 마녀의 이름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자백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악마와 결탁했기 때문에 고문을 버틸 수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화형에 처했다. 여성에 대한 성적혐오를 덧씌워서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전 자본주의 단계의 삶의 방식을 해체하였다.

“중세 성인들이나 르네상스 마법사들의 책에서 등장하는 악마는 사악하지만 힘이 없어서 성수, 혹은 성스러운 단어 몇 개로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존재였다. 또 악마는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언제나 마법사와의 관계에서 하수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그려졌다.(276쪽).... 하지만 마녀사냥은 악마와 마녀의 관계를 역전시켜서 여성이 악마의 하수인이 되도록 설정하였다. 그리고 악마는 남성적인 존재로서 여성을 소유하는 주인, 뚜쟁이, 남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마녀들은 악마와 성교를 하고, 남성의 생식력을 마비시키거나 성기를 거세하고 훔쳐서 감추어 두었다가 돌려주기도 한다는 소문도 무성했다."(277쪽)

남성들의 적으로서 성적인 위협을 주는 여성상이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마녀사냥의 기원은 아메리카를 정복한 유럽인들이 인디언들을 착취하고 지역의 신들을 모시는 원주민들을 악마화해서 살해하면서 이루어진 인종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한다. 원주민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유효했던 마녀사냥은 종교적으로 우상파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승인되었고, 유럽으로 전해져서 통제되지 않는 여성들, 근대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는 잉여인간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캘리번은 누구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괴물로 자신이 살고있는 섬에 침입한 적들을 물리치는 저항의 상징이다. 저자는 마녀들과 함께 캘리번을 내세우면서 다양한 역사 안에서 강간과 노동력 수탈, 죽임을 당해온 여성들이 그럼에도 정복되지 않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여성들은 정복하지만 정복되지 않는 땅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 땅은 온갖 생명을 잉태해서 자라게 하고, 다시 소멸할 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는 어머니이고, 그 땅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풀과 동물과 소통하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고 마법의 주문을 통해서 약을 만들어주는 의사는 바로 마녀인 여성이 간직한 전통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마녀사냥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근대의 이성에 힘 입어서 신학을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근대 식민주의와 그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함께 걸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21세기도 수많은 여성이 여전히, 마녀로 고발당하고, 착취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래도 여성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죽음은 인류의 소멸과 이어지는 침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전통이 “마녀사냥”으로 훼손되었다면, 새로운 꼬마마녀들은 새롭게 그 전통을 살려내며, 생명의 의미 또한 새롭게 회복시킬 것이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한국어판 서문의 결론으로 마녀사냥을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가늠해보자: "역사는 정치의 하수인입니다. 우리는 억압받는 집단들이 공동체적 구조를 유지하고 재생산 조건에 대한 일정한 통제력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반드시 착취자와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역사 속에서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14쪽)

▲ 불에 타고 있는 마녀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최우혁 (미리암)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며 공부하였다.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에디트 슈타인의 마리아론으로 교황청립 마리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가톨릭여성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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