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식의 포토에세이]

 그를 만난 것은 삭풍이 몰아쳤던 이른 아침이었다. 1900가구가 오순도순 함께 살았던 아름다운 마을이 철거 때문에 폐허가 되어 가는 황량한 벌판 위에서 그를 만났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 차가운 바람은 살갗을 뜯는 듯했다.

그는 30살 청년시절 만덕 5지구로 이사했다. 만덕으로 입주하고 2년 뒤에 장가를 갔다. 아직 뜯기지 않은 지금의 집에서 결혼생활을 했고, 아들과 딸을 낳고 키워 대학을 보내고 출가를 시켰다. 건설노동자인 그에게 그의 집은 그의 전 인생과 다름 아니었다.

그는 모든 집이 철거되고 있는 동네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토해 낸다. 그는 “이 마을은 부산에서는 흔하지 않은 마치 바둑판같이 잘 정비되어 있던 동네였습니다. 집집마다 대문을 마주보고 있으며, 넓은 골목길에서 자신의 자동차를 모두 주차하고도 남는 넉넉한 공간이 함께 했던 동네였습니다. 막걸리 한 잔이 먹고 싶으면 대문을 나와 골목길에 돗자리 하나만 깔면 오고 가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지냈던 다정다감한 동네였습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추나무 아래서 나누었던 따뜻한 정이 그립습니다.”라며 파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 박정태 씨는 38년을 살았던 집 앞에서 나를 맞았다. 그의 낡은 집은 그의 전 인생에 다름 아니었다. ⓒ장영식

만덕 5지구는 1970년대 도시재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부산의 영도 청학동과 수정동 등지의 산동네에서 강제로 이주된 마을이었다. 처음에 이곳으로 강제 이주되었을 때만 해도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주택은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대문도 없었다. 겨울철에 이주한 주민들은 이주할 때 가져왔던 판자 등으로 모닥불을 피워 겨울 추위를 견뎠어야 했다. 이곳으로 이주한 주민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가난을 함께 나누며 정이 깊은 마을을 일구어 왔다.

만덕 5지구 주민들의 아픔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헌 집 주면 새 집 줄게’라는 말로 주민들을 유혹했다. 2000년에 합의했던 보상금 지급은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의 합병 관계로 늦어졌다. 그 사이 부동산 값은 폭등했다. 2000년에 이주가 시작되었더라면 지금의 갈등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덕 5지구 철거는 2014년에 시작됐다. 2000년에 합의한 보상금으로는 자기의 집을 두고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정부가 건설업자들의 폭리를 막고 양질의 값싼 주택을 공급한다는 취지로 세운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원주민들의 눈물과 절규를 외면하고 개발 이익을 위해 원주민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폐허가 된 마을을 바라보며 지금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을을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정을 나누며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이다. 그는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주거생존권”을 요구하며 오늘도 부산 초량에 있는 LH 부산울산본부 앞의 농성장으로 향한다. 농성장의 농성 숫자는 어느새 50일이 훌쩍 지나고 있다.

▲ 지금도 만덕 5지구에는 개구쟁이 꼬마 녀석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고, 마을 골목골목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소리와 향기로 북적일 것만 같았다. ⓒ장영식

장영식(라파엘로)
사진작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