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27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41-52

오늘 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말하자면, 왜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신다는 성전에 머물러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성전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일종의 특별함을 부추긴다. 거기엔 하느님께서 현존한다는 믿음이 있으되 다른 장소와는 절대적으로 구별된 특별함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이후 성막을 출발로해서 이런 성전의 공간적 특별함을 견지해 왔다. 속된 세상의 이곳 저곳과는 다른 하느님스러운 것들로 꾸미고 인간들은 그것으로 하느님을 인지해 왔다.

공간적 특별함은 시간적 특별함으로 이어진다. 다른 일상의 시간과 다른, 일 년에 세 번은 성전을 향해야 한다는 특별한 시간적 의미를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반복적으로 되새겼다.(신명16,16 참조) 오늘 복음의 시간적 배경인 파스카 축제도 그중 하나다. 열두 살이 된 예수에게도 이번 파스카의 의미는 무겁게 다가갔을 테다. 이스라엘의 남자는 열두 살이 되면서부터 율법의 규정들을 지켜야 했다. 예루살렘 성전에로의 발걸음은 예수에겐 특별한 의무사항이 된 것이다.

공간적이든, 시간적이든 그것의 특별함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이 되어 버린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의 관습이자 익숙함이 되었다.(루카 2,41 참조) 파스카는 이집트에서의 해방이라는 특별하고 고유한 사건의 기념임에도 일상의 시간은 탈출한 이스라엘의 기쁨을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 '예수의 어린 시절', 제임스 티소.(1894)
루카가 그려 내는 오늘 복음의 특징은 인간의 평범함과 익숙함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한번 특별한 무엇을 끄집어 내는 데 있다. 파스카 축제를 끝낸 뒤 돌아올 때 예수는 그 부모와 함께하지 않았다. 왜, 무엇 때문인지 루카는 설명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삶의 익숙함이었으되 내려오는 길에선 낯선 상황에 맞닥뜨린다. 예수의 부모는 이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는 사실만 루카는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예수는 오히려 담담해 하는 상황 또한 우리에게 낯설다. 부모와 우리에게 낯선 상황이 예수에겐 당연했고 그러므로 일상이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예수와 율법 교사와의 만남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루카는 놀라워하는 사람들과 예수의 부모만을 기억한다. 사실, 루카에게 있어 예수의 등장 자체는 하나의 놀라움이었다.(루카 2,18.33; 8,56; 24,22; 사도2,7.12참조) 일상의 익숙함은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비껴간다. 예수를 만난다는 건, 놀라움의 연속이고, 익숙함에서의 해방인 셈이다.

우리 인간에겐 낯선 것이나 예수에겐 일상인 것을 찾아나서는 것이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가정은 아들 예수를 낯설어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그런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된 신, 예수가 만나 이루어진 공동체다. 남들보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 일찍 퇴근해서 집안일을 함께할 수 있는 가정적 남편만 있으면 성가정이라 여기는 일상의 아주머니들에게 예수의 가정은 어떻게 느껴질까. 신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인간이 우리와 함께한 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지도 않게 우리의 신앙은 특별할 것도, 특출날 것도 없이 되어 버리진 않았을까. 신앙의 이름으로 고착돼 버린 문화가 신을 배척할 수도 있다는 사실, 되새겨 봄직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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