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13일(대림 제3주일) 루카 3,10-18

요한이 말한 것들을 훑어 보건대, 그건 기쁜 소식이 아니다. 최소한,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에 물든 한국사회에선 슬픈 소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옷을 두 벌 가지지 말 것’, ‘정해진 것만 챙길 것’, ‘봉급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 것’. 이런 권고들을 관통하는 부사를 찾으라면 ‘이대로’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금 ‘이대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미래에 다가올 메시아를 기다리는 올바른 자세다. 갈고 닦아 보기 좋게 만들어 놓는 내 삶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필요조건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행여 결핍의식과 과잉으로 점철된 욕망 덩어리가 아닌지 혹은 현재를 부정하고 미래에 있지도 않을 나만의 행복을 위해 사회와 고립된 허상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세리와 군사들은 시대의 죄인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의 죄라는 건, 넘쳐나는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세금을 더 거둬들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세리,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거부한 로마의 용병자리로라도 시대의 주류에 끼어들고자 했던 군사들, 그들에게 욕심이란 건 인민의 현실을 이용해 계급적 차별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무엇을 더 이상 할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삶을 돌아보길 권고한다.

사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대에 찬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는 ‘또 다른 무엇’을 할 기세가 상당했다.(루카 10,25; 사도 2,37 참조) 그 기대는 대개 자신의 본모습을 한 번 더 덮어 버리는 데 소용된다. 지금의 나를 보지 않은 채, 정답으로 치부되는 ‘합당한 자세와 행위’를 묻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대치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메시아를 원하되 메시아의 가치는 세상 사람들 수만큼 다양해서 참된 메시아는 늘 외롭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찾아 나서면 메시아의 가치는 우리 기대치 딱 그만큼 왜곡되거나 축소된다. ‘내가 내려놓을 것이 무엇’인지 찾아나설 때, 메시아는 자유로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 또한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자신을 낮추는 것, 신발 끈도 풀 수 없을 만큼 낮추고 또 낮추는 것 외엔 메시아를 만날 방법이 없다. 온화하고 정갈한 도인같은 모습을 보러 메시아가 오시는 게 아니고 짓눌려 짜증나고, 뜻대로 되지 않아 독해지고, 어떻게든 내가 살아야겠다며 뭐든 쥐어보고 쥔만큼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따져 보는 우리의 지친 일상에 메시아는 오신다. 그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고 비워 내는 것으로 메시아는 자유로이 우리 곁에 와 계신다.

예전 고향 친구들과 만들었던 ‘계모임’ 이름이 ‘이대로’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 쭉 우정을 나누자는 의미로 그렇게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만날 때마다 예전 그대로인 친구들이 늘 정겹다. 그렇게 우정은 되새겨지고 켜켜이 쌓여 간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건, 지금의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나를 제대로 본다는 건, 대개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낮 동안 일하면서 도드라지는 나의 한계와 부족함은 부끄러운 저녁을 불러온다.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예수를 섬긴다면서 미래의 화려한 나를 섬기기 위해 거짓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하며, 과거의 잘잘못에 허덕이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현실이 그러니까....”라며 애써 합리화 하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이대로, 더 나을 것도 더 못할 것도 없는 듯, 그렇게 예수께 나아가면 된다. 예수는 의인이든 죄인이든 사랑하고 있으니까....

이 글은 <야곱의 우물>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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