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6일(대림 제2주일) 루카 3,1-6

티베리우스 황제, 본시오 빌라도 유다 총독, 헤로데, 그리고 한나스와 카야파.... 이들 모두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이들로 인해 예수의 탄생은 역사성을 보장받을 수 있고, 예수의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전설이 아니게 된다. 주석서들은 역사 속에 오실 메시아의 시대적 상황을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 서술하는 루카의 현실적 의도를 분명히 지적하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세상의 시간이 몇몇 위정자들의 존재 가치나 권력 체계의 경중을 통해 규정되는 것에 오늘 복음은 저항한다. 광야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구체적 현실이고 역사이되,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 체제를 비껴간 자리에 광야는 존재한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지배체제에 기대어 예수는 오지 않는다. 예수의 역사성을 기존 체제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태초부터 계셨고, 종말에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거시적 시간을 살고 있는 예수는 인간 역사의 한 대목을 그 근본부터 새롭게 써 나갈 것이고, 그 역사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이런 저런 이해관계에 따라 파편처럼 써 놓는 조각난 역사와는 결이 다르다.

▲ '요한 세례자', 엘 그레코.(1600)
요한은 지금 광야에 있다. 현실을 비껴간 곳에서 이사야의 말씀처럼 주님의 오실 길을 마련하려 광야에 머문다. 요한을 두고 에세네 파 소속이었다느니, 기존 권력체계를 벗어나 민중 세례 운동의 전형이라느니 하는 해석은 잠시 내려놓자. 요한은 새롭게 길을 만들 사람이지, 기존 길을 다듬거나 정리할 사람이 아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도록 하는 데 요한의 가치는 머물 것이며,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도록 요한은 외칠 것이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마디에 주목하자. 모든 것이 뒤바뀐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새로워진다. 예수의 오심은 모든 걸 바꾸어 놓는다.

국정 교과서로 나라가 지금까지 시끄럽다. 주위 나라로 눈을 돌려 보니 북한이 국정교과서를 가지고 있고, 몇몇 후진국과 독재 국가에서 국정 교과서는 존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우리 주교님들은 국정교과서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정 교과서 논란을 굳이 대림절, 오늘 복음과 묶어 말하는 것이 억지스럽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가 분명 있을 테다. 역사 교육의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위임한다 하더라도 루카를 통해 우리는 역사 교육의 문제 이면에 흐르는 ‘모나고 철없는 목소리들’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올바른 교육’은 스스로 ‘올바르다’ 외치는 이의 편협한 목소리로 규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잣대와 관점으로 ‘올바름’은 도대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현실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게 너무나 힘들다는 사실을 제자들과 군중들의 편협하고 완고한 모습에서 여실히 보지 않았나. 그리고 예수는 여전히 이런 저런 분이라며 해석에 해석을 낳는 ‘다양한 의견들’의 만남 안에서 재정립되고 재평가되어 오늘 우리 삶을 관통하고 있지 않나. 예수는 그 ‘다양한 목소리들’이 서로 상쇄되거나 조립되면서 깎이고 다듬어져 우리 곁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주님 오시는 길을 만들어 갔던 요한의 창조적 작업이 예수를 맞이한 것처럼.

예수를 기다린다는 것은, 역사 교육을 올바르게 하겠다는 ‘모나고 철없는 목소리’를 타이르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조용히 가르쳐야 한다. ‘네 목소리 말고 다른 목소리도 있단다’라며 우리 신앙인은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임금과 총독, 그리고 위정자들의 틈바구니 너머 외롭고 쓸쓸한 광야에서 새로운 길을 내고, 거기에 예수가 오신다고 외치는 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에 분명한 스캔들로 작동할 것이다. 그 끝은 세상의 입장에선 십자가였지만, 우리 신앙의 입장에선 부활이었다. 육을 주인 삼아 육의 욕망을 드높이는 목소리 앞에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여유롭게 담아낼 수 있는 자, 우린 이런 이를 ‘올바른 신앙인’이라 부른다. 현실의 논리가 득세하는, 남보다 나은 행복, 성공 그리고 외형적 성취가 화석처럼 굳어진 목표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예수는 여전히 낯설고 거친 이방인일 뿐이다.

이 글은 <야곱의 우물>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박병규 신부 (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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