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20일(대림 제4주일) 루카 1,39-45

마리아의 노래는 저 옛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다시 표현해 낸 것이다.(1사무 2,1-10) 한나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노래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사회 계급의 대립적 구조다. 마리아를 묘사하는 말마디는 ‘비천함’이다. 반면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엘 샤다이, 탈출 6,3 참조)’으로 인식된다. 비천한 마리아가 전능하신 분을 찾는 이유는 세상에 억눌려 소외되고 기가 꺾인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현실적 ‘힘의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신심이 깊거나 영적인 능력에 집착하는 이들, 또 아니면 교조주의에 빠져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합리성만 따지는 이들에게 마리아의 노래는 자주 종교적 언사로만 인식된다. 현실적 힘의 논리와는 상관없이 마리아의 노래를 언급하는 데 별다른 저항이 없다. 이런 현상은 역사의 생생한 자리에서 주님의 피로 얼룩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각자도생의 길에 집착하는 맹신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리아의 노래는 ‘종교적’ 편향성을 지양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이야기 또한 품고 있다. 온 백성이 마리아를 복되다 하고, 권세 있는 자들, 부요한 사람들을 내치시고 돌려보내시는 건,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이고, 돈 이야기이며, 권력 이야기다. 거기에 하느님은 비천하고, 보잘것없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전능하신 팔”을 펼치신다. 뜬구름 잡듯 하늘에서 호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으로 구체적 현실 안에, 그것도 비천한 이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다.(시편 98,1; 118,15-16; 이사 51,9; 52,10).

▲ '마리아의 방문',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1445)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의 구원이나 영달을 위한 자기 암시의 노래가 아니다. 루카는 분명히 현실적 가난과 사회적 억압의 자리에 예수의 복음을 배치시킨다.(루카 4,16 이하 참조) 마리아는 현실의 아픔과 정치 경제적 대립 안에 오시는 하느님의 지상 삶을 미리 예언하는 셈이다. 십자가의 길, 그 길을 하느님은 걸으실 것이고, 마리아는 어머니로서, 신앙인으로서 함께할 것이다.

요즘 들어 잠시라도 짬이 생기면 유독 하나의 일에 집착한다. ‘묵시사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무슨 무슨 사회’라며 유행하는 제목으로 쏟아져 나오는 책들 속에 조심스레 편승하고픈 마음에서다. 덧붙여, 배운 바를 통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무슨 사회’라는 제목을 가진 책들은 대부분 한국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예리한 관찰력과 인문학적 소견으로 분석하고 비판한다. 배움이 현실에 조응하여 살아 있는 지혜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보여 주려는 것일 테다.

‘묵시사회’라는 글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적어 보았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난 역사를 살다간 이들에 대해 빚진 마음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책임, 그리고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연민이 어우러져 지금 여기서의 실천적인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성경을 읽고, 예수를 만나는 우리들은 현실을 살아간다. 성경 안의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 화려한 천상에서가 아니라 굴곡 많은 현실의 세상에서 예수는 죽어 갔고 현실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예수는 늘 함께한다. 말씀은 늘 현실을 향하고 있는데, 우리는 늘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말씀을 유토피아(자리가 없다는 말,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로 내몰며 허망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없는 이를 억압하고, 배고픈 이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못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팔을 믿고 담대히 ‘그러지 말라’ 외치는 현실적 저항이 마리아의 노래 속에 묻혀 있다. 외쳐라, 분노하라 그래서 세상의 부조리를 바꿔라.... 이렇게 외치는 듯 마리아의 노래는 내 귓가를 즐겁게 파고든다.

이 글은 <야곱의 우물>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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