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 '괴물의 아이'의 한 장면 (이미지 제공 = 얼리버드픽쳐스)
사람으로 살아가기 힘들 때 우리는 생각한다. 짐승으로 살면 어떨까. 사람이라는 걸 잠시 잊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모른 척 하고 살면 편해질까.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 살면 견디기가 수월해질까. 정말 그럴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괴물의 아이(The Boy and The Beast, 2015)’를 보면 세 가지 세계가 고루 등장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 짐승계 그리고 괴물의 세계다. 흔히 내뱉는 ‘금수만도 못한’ 혹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식의 표현은 사실 갈 데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만들어낸 언어에서만 통한다. 짐승계에서 알면 항의할 저속한 표현이다. 짐승의 세계는 인간세상의 하위 개념이 아니었다. 그저 짐승들이 살고 있는 다른 차원의 어떤 세계다. 거기에도 나름의 질서와 체계가 있고,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고 ‘어른’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엄격한 훈육 과정이 있다.

말하자면, 생김새가 ‘인간’ 같지 않다고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짐승계의 성원들은 말한다. 오직 인간만이 괴물이 된다고. 인간은 나약해서 가슴 속에 어둠을 품고 있다고. 인간 가슴 속에만 있는 어둠의 힘이 괴물을 키우는데, 나중에 관객들은 그 ‘가슴 속의 구멍’이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 것인지를 보게 된다.

물론 어느 세계에나, 타인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의 방식으로 좌충우돌 하는 캐릭터가 있을 수 있다. 곰의 형상을 닮은 ‘쿠마테츠’는 짐승의 세계에서 홀로 돌출적인 존재다. 기이한 행태로 살고 부대끼고 싸운다. “부모도 스승도 없이 혼자서 강해진 거야. 강해져 버린 거지”라는 게 주변의 평가다. 남의 말을 안 듣는 그에게 유일한 지침은 “의미란 스스로 찾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다. 쿠마테츠는 아무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힘으로 최강이 되는 데는 성공했다. 문제는, 아무도 그를 응원하거나 좋아하지 않으며 제자로 들어오려는 이가 없어서 짐승 세계의 ‘수장’ 자리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점이었다. 덕 있는 경쟁자 이오젠을 모두가 따르는 것과는 극단적으로 달랐다.

짐승계의 진정한 강자가 되고 싶었던 쿠마테츠는 ‘제자를 키우라’는 수장의 엄명을 받고 인간 세상과 이어진 특정한 ‘벽’ 바깥으로 나간다. 거기서 한 아이를 만나 데리고 온다. 인간의 아이 ‘렌’이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엄마와 살았는데 그만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빠와는 연락도 안 닿는다. 외가 친척들은 이 슬픈 소년을 짐짝처럼 자기들 거처로 이동시키려 한다. 무작정 뛰쳐나와 시부야 뒷골목을 헤매던 아홉 살 소년 렌.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싫어.” 뿐이다. 그 말을 싸늘하게 내뱉을 때, 소년의 가슴 속에서 어둠의 구멍이 입을 벌린다.

갈 곳을 잃은 소년은 쿠마테츠와 마주치게 되고, 그를 따라 우연히 짐승계에 들어선다. 제자가 되겠다면서도 제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이 고집불통 아이를, 쿠마테츠는 아홉 살이니 ‘큐타(9)’라고 부른다. 남의 말을 안 듣기에 적절한 충고도 못하는 쿠마테츠가 스승 노릇을 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외로운 소년은, 쿠마테츠 또한 자기처럼 외톨이라는 것에 동질감을 느끼며 그의 모든 행동과 싸움의 기술 등을 따라하기 시작한다. 사사건건 부딪히며 기묘한 동거, 기묘한 훈육을 시작하게 된 둘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가족처럼 변해간다. ‘혼자서 강해진 자의 업보’를 안고 살던 쿠마테츠가, 제멋대로 살아와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게 제일 힘든 일이었던 그가, 큐타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정성을 기울이며 자기도 모르게 스승과 아버지 노릇을 한 것이다. 다들 인간의 아이를 용케도 키웠다고 놀란다. 그러나 수장은 말한다. “더 많이 성장한 건 쿠마테츠야.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르겠군.”

▲ (이미지 제공 = 얼리버드픽쳐스)
이렇게 아끼고 위하는 동안 소년은 열일곱 살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자 둘은 정말 강자가 된다. 하지만 어느 새 훌쩍 커버린 큐타는 인간 세상에 자꾸 관심을 갖는다. 자신을 키워줬다고 해서 그가 짐승계에서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고, 진짜 아버지도 만나고 싶다. 그러면서 큐타는 비로소 정말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으로도 짐승으로도 살았던, 아니 어쩌면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살았던 ‘자신의 정체’와 정면승부를 해야 했던 것이다. 두 세계를 오가는 벽을 빈번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큐타는 심하게 방황한다. 정말 질풍노도의 시기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다. 쿠마테츠 또한 큐타의 불안에 전염된다. 큐타는 번민한다. “가르쳐줘. 대체 내가 누군지. 인간인지, 짐승인지, 괴물인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계에서 버려져 짐승들이 키운 두 소년이 ‘괴물’이 되어 서로를 죽일 듯 싸우는 장면에 이르면, 영화 내내 암시되던 괴물이란 게 무엇인지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인간만이 괴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다만 “가슴 속의 검”이 제대로 날이 서 있을 때, 인간은 이 깊은 어둠을 사르고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만화영화의 형태긴 해도 어른을 위한 작품이다. 이 감독만큼 ‘인간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혹은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드물다. ‘괴물의 아이’는 사실 너무 많은 의미와 장면들을 집어넣은 탓에 전작 ‘늑대 아이’의 팬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못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열일곱 살 시절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폭풍 같은 시절이 아닌가. 다 보고 나면 특히 마지막 장면에 길게 흐르는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끝까지 듣고 나면, 가슴 속에서 뭉클한 것이 솟구치는 느낌이다. 고래든, 날카로운 검이든, 제대로 가슴 속에서 키워내려면 누구나 길고 험난한 성장통을 견뎌야 한다. 그 모든 방황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오는 용기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반드시, 무언가는 끝나지만 또 무언가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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