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 루카 21, 25-28. 34-36

오늘부터 매주 박병규 신부가 '지금여기 강론대'를 맡습니다. 강론 집필을 맡아 주신 박병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오늘 복음은 묵시적 표현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묵시’라는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말하자면, 닫힌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말입니다. 대개의 묵시 문학적 작품들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실은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언어적 유희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애절함을 담아 내는 것이 묵시 문학적 작품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달픈 현실을 더욱더 아프게 하는 이들에겐 하느님의 심판이 주어지길 바라고 그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채 꿋꿋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고자 하는 것이 묵시 문학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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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도 묵시적 종말의 시간에 구원을 위한 이들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민족들이 공포에 싸일 시간은 신앙인들에겐 허리를 펴고 머리를 세울 희망의 시간이 됩니다. 허리를 펴는 것, 머리를 세우는 것은 희망과 신뢰를 나타내는 유대 전통적 표현이기도 합니다.(판관 8,28; 욥 10,15; 시편 24,7; 83,3 참조)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두려움에 휩싸일 때, 우리 신앙인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속량이라는 단어를 함께 묵상해 보면 좋을듯 합니다. ‘속량’의 본디 의미는 ‘획득된 해방’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들은 대개 무언가에 억눌려 있거나 속박되었을 때, 혹은 그 무엇을 너무나 갈망한 나머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실망을 거듭하며 결국엔 스스로를 포기할 때 나타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도록 내려놓고 비워 내고 해방되는 것이, 세상 것에 휘둘리고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두려워하는 뭇 민족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색깔이 아닐까 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야훼’, 곧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으신 있는 자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삶을 나의 아집과 편협함으로 덧칠해 버리는 우리의 노예 근성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 하루 해방되는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이 글은 <야곱의 우물>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자

 
박병규 신부 (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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