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뷰티플 클리셰!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입장들을 놓고 검토하는 자리였는데, 지도 교수가 내 의견을 물으셨다. ‘다양성 안의 일치’가 중요하다고 답을 했더니 교수님이 웃으면서 한 마디 하신다. “A beautiful cliche!”, 뻔한 미사여구로 눙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표현 자체는 의미심장하지만 그것을 막상 구체적인 자리에 대입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 진부한 표현들을 클리셰(cliche)라 한다. 신학적 언어 안에서도 클리셰로 통용되는 표현들이 제법 있다. 다양성 안의 일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지만, 막상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공존할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히면 원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미세한 갈등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예컨대 교회가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거론하기는 쉽지만, 친한 친구가 문득 커밍아웃을 해올 때, 그리고 그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와 나 사이에 생기는 어색한 기류는 저 ‘뷰티풀 클리셰’로 단숨에 걷어낼 수 없다.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 ‘교회의 종탑이 높아가는 사이에 그 그림자는 더 길어진다’는 멋진 표현들도 신설 본당에 발령받아 천막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교우들의 불편을 피부로 느끼는 본당신부에게는 다소 거리감 있는 이상이 되고 만다. ‘성직자의 청빈과 가난’은 욕망으로 얼룩진 소비사회에서 한 방울 이슬처럼 영롱한 덕목이지만, 기초생활수급대상자 홀어머니 걱정에 그늘지는 외아들 신부의 고민 앞에서는 뻔하고 진부한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흔히 ‘악마는 디테일(detail, 세부사항)에 있다’고 하는데, 총론에서 무난했으나 각론에서 격렬하게 대립하는 협상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복음의 이상이 구체적인 현실과 부딪히는 곳에는 언제나 디테일의 악마도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2. 사회교리는 이를테면 총론이다.

▲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서 사회교리를 지침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신앙인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장상의 구체적인 발언과 입장 표명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리고 그 가르침을 새기고자 하는 신앙인들의 요청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교리서도,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의 말씀조차도 언제나 ‘총론, 원론’이라는 데 있다.

최근 몇 년간 교회 안에서 분열과 갈등을 빚어 냈던 사안들만 해도 그렇다. 4대강 문제, 세월호 문제, 그리고 역사 교육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교리는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현실은 교리서나 성명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촘촘한 그물망에 갇혀 있어서 그 말씀을 귀로 듣는 이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복음과 사회교리의 선명함과 대비되는 이 현실의 모호함을 걷어 내려고 많은 이들이 장상의 입에 주목한다. 하지만 어쩌랴! 언제나 원론은 원론이고 각론은 각론인 것을!

장상이 아무리 분명하고 똑 부러지게 입장을 표명한다 한들,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의 이해관계를 단숨에 정리해 낼 수 없다. ‘간추린 사회교리’만 해도 목침 대신 베고 자도 될 만큼 두꺼운 책인데, 교회가 얼마나 더 많은 문서와 성명을 발표해야 모든 신앙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을 내어 놓을 수 있을 것인가?

3. 문제는 각론이다.

수백만을 헤아리는 한국 교회에서 모든 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율할 수 있는 각론 형태의 사회 교리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부지런한 신학자라 해도 사회적인 문제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저 미세한 갈등구조들을 다 이해하고 풀어낼 재간은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결국 구체적인 사회교리의 지침은 언제나 ‘나’의 이해와 실천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지 어느 권위 있는 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표현도 원래는 ‘신(神)은 디테일에 있다’는 어느 저명한 건축가의 말을 뒤집은 것이다. 신도, 악마도 결국은 디테일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디테일을 권위자의 몫으로 돌리기에는 세례 받은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직분이 너무도 귀한 것이 아닐까.

박용욱 신부 (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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