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평화 - 서로 인정하는 정의의 상태

‘희망의 신학’으로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hlfhart Pannenberg, 1928-2014)는 평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평화란 상호 관계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서로 인정된 잠정적인 정의(正義) 상태다.”

▲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1928년에 태어나 제3제국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체주의의 광기를, 그리고 냉전시기와 1960년대의 극심한 좌우 대립을 고스란히 경험한 판넨베르크는 상대를 제치고 일방을 철저하게 관철함으로써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들을 믿지 않았다. 성경적 전통에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정의와 평화란 곧 하느님 나라이며, 이는 오직 하느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것이다. 냉전이 낳은 이념 경쟁 속에 경쟁의 양측은 각기 자신을 지상천국인 것처럼 주장했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루실 미래의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판넨베르크는 익히 경험했다.

그런 의미에서 판넨베르크는 진보와 보수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이루실 미래를 적대시한다고 보았다. 보수 세력은 미래에 대항해서 현상태를 보전함으로써, 그리고 진보 세력은 자신의 비전을 미래에 강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완성하시는 미래의 약속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현상태의 세계는 더 이상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없을 정도로 완성된 세계가 아니며, 동시에 미래는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호 관계하는 당사자들 간에 서로 인정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절대성에 비추어 각자가 추구하는 정의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상호 인정하는 가운데 평화로 향하는 여정이 열린다는 것이다. 대화는 그래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기본 조건인 셈이다.

거짓 평화와 거짓 정의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정의와 평화의 기본 조건조차 채우지 못하는 소통의 빈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웃을 갈라놓는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생태계를 위협하는 폭거가 줄을 잇는 가운데, 우리 사회는 그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해 왔다. 용산과 강정과 밀양에서, 팽목항과 안산과 광화문에서 대화 좀 하자고 애걸하고 매달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이들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감함은 도를 넘은 지 오래다.

내 일상이 평화롭지 못하다는 절절한 목소리에 귀를 닫고, 불의한 사회와 마찰음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오히려 평화를 깨뜨리고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킨다는 혐의를 덮어씌운다. 높디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서 소리를 쳐도 못 들은 척, 철탑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매달려도 못 들은 척, 한여름 아스팔트 바닥에서 몇 날을 버텨도 못 본 척한다. 왜 이래야 되느냐고, 권력과 욕망과 이기심과 타산이 세상의 전부냐고 항의해도 아무 대답이 없다. 그만 좀 시끄럽게 하라, 이 돈 받고 입 다물라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대화가 없어야 평화가 온다는 저 강퍅한 태도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차갑게 얼려 버린 것 같다.

▲ 지난 7월 3일에 찍은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전광판에서 고공농성 중인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모습 ⓒ강한 기자

대화는 평화의 기본 조건

지난 며칠을 불안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은 남북의 대치 상황이 다행히도 대화를 통해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별 다른 성과도 없는 공동 보도문이 대화의 결실로 포장되는 가운데 참된 대화와 소통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대화가 최선의 방법임을 또 한 번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대화를 가로막으려는 이율배반이 두드러질 뿐이다. 남과 북의 무력 충돌도 대화로 막게 되었다면서 정작 대화의 테이블에 함께 앉기를 요구하는 약한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된다. ‘철천지 원쑤 괴뢰도당’과 ‘민족의 원흉’도 함께 하는 대화를 왜 같은 국민들끼리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국가 권력이 주권자이고 납세자이며 투표권자와 대화를 거절하는 사회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다는 말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 제5장에서 평화의 증진을 이야기하면서 평화가 한번도 영구히 얻어진 것이 아니고 언제나 꾸준히 건설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라 밝혔다(사목헌장 78항). 죄의 상처를 입은 인간(사목헌장 78항 참조)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이 세상이 완전히 평화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 지금의 평화를 참 평화라 여기고 더 이상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평화의 기본을 허무는 사람인 것이다.


박용욱 
신부 (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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