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스스로 신학자가 된 정치인들

1.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폭력의 유혹

그리스도교는 폭력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유일신교는 그 의미 체계의 중추요 기반이 되는 신관에서부터 다른 일체의 신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가치 체계를 용인하기 쉽지 않다. 역사상 수많은 종교 분쟁과 전쟁들이 유일신론과 그에 따른 배타적 진리관에 연관되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학 언어가 품고 있는 보편적 인간 이해 또는 단일한 인간 이해 역시 폭력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철학과 신학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단수로 다룬다. 신학적 전망 아래서 모든 인간은 개별적 차이를 떠나서 하나의 인간, 하느님 앞에 불린 단일한 인간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학적 언어에서 나타는 인간의 단수성은 어떠한 차별도 뛰어넘는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겪는 다양한 갈등과 조정의 필요를 다루기에 한계가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정치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복수의 인간을 상정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견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을 조정, 조율하는 데 정치의 존재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래서 정치가 신학의 언어를 빌리게 될 때 폭력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역으로 신학이 정치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폭력은 발생한다) 1897년 하느님께 기도하던 중에 필리핀을 모두 흡수한 뒤 그들을 문명화, 그리스도교화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60만 필리핀인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의 25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그로부터 약 100년 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대통령은 생생한 예다.

▲ 미국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왼쪽), 부시 대통령.(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2. 폭력의 유혹을 물리치다

이러한 독선과 폭력의 유혹으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 성경을 통해 계시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체적인 실천, 그리고 사회교리의 원칙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교회의 목표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차이와 구별을 넘어서는 보편적 사랑과 공존의 영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교의적 기반 위에서 사회교리는 타인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가지도록 촉구한다. “사회, 정치, 종교 문제에 있어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호의와 친절을 가지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욱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그들과의 대화는 쉬워질 것이다.(사목 헌장 28항) 사회교리의 원칙들, 곧 공동선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등은 인간의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공동의 운명, 곧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하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폭력의 유혹에 노출되면서도 끊임없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멀리함으로써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3. 신학의 언어를 흉내내는 정치인

신학이 다양함을 끌어안기 위해 노력하는 데 반해, 정치의 언어가 그 본질을 잊은 채 단일성에 집착하는 일이 최근 두드러지고 있다. 이른바 ‘올바른 역사’를 강요하는 정치인들의 언어가 특히 그러하다. 무릇 역사에 정설(定說)은 있어도 정설(正說)은 없다는 것이 상식일진대, 이 상식을 엎으면서 ‘올바른’, 달리 표현하자면 ‘유일한’ 역사 해석과 교육을 강요하는 모습은 가히 정치인이 종교의 언어, 신학의 언어를 넘보는 행태로 보인다. 종교인이 정치를 거론할 때 정교분리를 외치던 정치인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본령이라 할 정치의 영역에서 신학의 언어를 흉내 내는 이율배반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비판이나 다양한 입장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저 단호함이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간 겨레를 찢어 놓은 양극화의 문제나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던 정치인들이 느닷없이 ‘영광스러운 조국’의 ‘단일하고 올바른 역사’를 강조하는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아무튼 그들이 벌이는 이 시끌벅적한 소동을 굿판에 비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종교의 영역에 무지한 이가 함부로 종교의 언어를 입에 올리면 우리는 그를 선무당이라 부른다. 역사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선무당의 굿판, 우리가 오늘 눈으로 보고 있는 모습을 달리 무어라 부를 것인가.
 

박용욱 신부 (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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