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지인 중 한 명이 지금은 오랜 냉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사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세례를 받고 언젠가부터 성당에 발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의 계기는, 외동딸로 홀로 자라다 보니 학교 친구들이 있는 성당에 따라다녔던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자연스레 교리와 세례를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리의 내용 중에 지옥에 대한 부분이 그에게는 일종의 공포감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냉담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이 두려움 때문이었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그냥 함께 성당에 다녔지만 학교생활에 매이기 시작하면서 슬슬 신앙생활과 멀어졌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따르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따르는 태도로 가름할 수 있겠습니다. 후자가 제공하는 두려움에는 구체적으로 '지옥'이라는 공간이 자리합니다. 지옥은 영원한 벌이고, 희망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입니다. 이곳에 던져져서는 안 되기에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억지가 생겨납니다.

▲ '지옥', 루카 시뇨렐리.(1502)

나는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에 임하고 있는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벌이 두려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어린 것이라 말할 수 없으니, 정작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를 깊이 깨닫고 일상을 통해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신 일을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권위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폭력적이기까지한 아버지의 모습과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혼동하며,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분명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자기 성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키시는 분이지 철저하게 당신 아래 사람들을 가둬 두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째 '하나이신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하냐구요? 그건, 우리가 이분만을 섬기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른 우상 아래 지배당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재물이잖습니까? 이것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지만, 오늘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경우를 더욱 많이 봅니다. 그래서 진정 행복을 원하는 이들은 재물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건 안 믿건 자신감과 내적인 여유를 보여 줍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자기를 지어 내신 창조주를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인간은 하느님 손아귀 안에 갇히는 것이니 완전히 좋은 건 아니라고 하신다면.... 그런 분에게 답은 없습니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니까요.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이런 분에게 제일 좋은 것은, 그가 누군가를 좋아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는 겁니다. 사람을 통해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사랑, 우정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좋은데 하느님은 싫다.... 라고 한다면,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봐야 합니다. 사랑은 기꺼이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자유를 훼손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삶에 의미와 기쁨을 줍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 인간은 철저하게 그런 일을 거부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누군가를 도와 주고, 이해해 주고,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는데도 그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그런 일들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모습을 닮고 당신과 연대해 주기를 원하시는데, 그런 요청에 조금도 응답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의 집, 즉 천국에서 맛보게 될 잔치에 오라고 보낸 초대장을 그냥 싸늘하게 찢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안 가겠다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갈까요? 그곳이 지옥이라 하겠습니다. 연옥은 (이곳에 대해서는 "연옥을 알고 있나요?"를 참고하시라고 권해드립니다.) 하느님과 연대하는 일을 최소한 한 번은 했던 이들의 영혼이 가는 곳이라 하면 좋겠군요.

지옥에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그곳의 영혼이 하느님의 사랑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철저하게 응하지 않는 '자유'를 구사한 영혼이 결과적으로 선택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지옥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사고체계보다 더 크고, 우리가 그렇게 못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가르쳐서 일부러 공포 분위기 조성하는 것은 못된 교회에서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지옥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으니 우리도 배우긴 해야 할 개념입니다. 그러하기에 정작 필요한 것은 지옥에 대해 건강하게 이해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릇되게 발목잡혀서 두렵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 불행이란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지독한 악인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를 보내고 싶은 곳을 상상합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뭐.... 그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겁니다만, 우리가 심판할 사안이 아님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심한 짓을 하는 이를 보며 우리는 그 공간을 설정합니다. 지옥은 이처럼 우리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옥"같은" 현실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희망이 절대적으로 막혀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지옥은 그냥 침묵할 때 실현될 것입니다. 내가 울고 있는 이들을 외면할 때, 자본의 노예가 된 언론이 제공하는 허구와 거짓말에 현혹될 때, 나만 잘되면 된다는 경쟁사회의 유혹에 순응할 때, 나는 여기에 지옥을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희망을 키우는 일은 앞의 태도들에 분명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이웃에게 전해짐으로써 드러납니다. 지옥같은 현실에 빛을 던지는 일입니다. 어둠을 걷어 내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까 두려워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거나 아예 숨어 있는 지인들이 계시다면, 이곳에서 먼저 어둠을 걷어 내는 일을 함께 하자고 초대하십시오. 지옥같은 현실은 고립으로 가중되지만, 천국을 일구는 일은 함께 함으로써 가뿐해집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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