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이 조자룡 헌 칼 꺼내들 듯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게 붉은색 덧칠하기였음을 모르는 이는 없다. ‘종북’이란 용어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고, 과거엔 ‘불온’이나 ‘용공’이란 말이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고 옭죄는 아주 ‘심쿵’한 효과가 있었다. 특히 1970년대엔 가톨릭도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 한 예가 함평 고구마사건이다.

▲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금.(사진 제공 = 가톨릭 농민회)
1976년 9월 농협 전라남도 지부는 건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사들이겠다는 수매 방침을 발표했다. 농민들은 그에 따라 고구마를 가공하지 않고 수매에 응했다. 그러나 막상 수매시기가 되자 전량 수매를 약속했던 농협이 실제로는 농민들이 생산한 양의 40퍼센트만을 수매했다. “걱정 말라”는 농협의 말을 믿었던 농민들은 시장에 내다 팔 기회도 잃었다. 당시의 전체 손해액은 1억 4000여 만 원으로 추산됐지만, 신고액은 가톨릭농민회(가농) 회원 중심의 160개 농가 309만 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보상을 요구하는 농민들과 가농에 대해 정부는 관련단체와 언론 그리고 심지어 민방위교육장을 통해 이들을 공갈, 협박, 회유는 물론 ‘용공’, ‘반국가적’ 운운하며 폭행과 사찰, 종교탄압의 지경에까지 몰고 갔다.

이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19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함평농민회 회원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윤공희 대주교와 농민회 지도사제단의 공동 집전으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기도회를 마치고 가톨릭농민회 지도사제단의 명의로 된 성명서는 “공업입국의 경제정책에 따라 농민은 저곡가에 시달리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식량증산에 전념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국내외 독점 재벌에게는 돈벌이로, 노동자에게는 저임금으로, 농민은 또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생산의 주체요 사회적 부를 창조하는 농민, 노동자는 비인간적이고 절망적인 생활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회악과 제도적 불의를 거슬러 항의하고 그 시정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 양심의 발로요, 우리의 복음적 사명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천명했다. 이 기도회에서 농민들은 고구마 피해 보상과 농민회 탄압 중지, 구속 회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27일에는 YMCA 인권기도회 참가자들이 단식 현장을 방문하자 정부는 기동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해산시키고 20명을 연행했다. 이에 단식 중이던 농민 회원들은 ‘전국 회원에게 드리는 글’을 발송했다. 가농은 이 글에서 정부가 “가농 및 교회 단체들을 ‘불온단체’,‘용공단체’ 운운하며 사실을 왜곡 날조하여 선전하고 농민회원을 위협하고 교회와 농민회를 모략하고 있다.” 고 주장하면서 “함평 고구마 피해액의 즉각 보상과 구속 중인 유남선, 정성헌의 무조건 석방, 가톨릭농민회 탄압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다. 29일 당국이 피해액 309만 원을 보상하고, 강제 연행된 이들을 석방하기로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단식 농성 중에 연행된 이상국, 조봉훈이 석방되지 않음으로써 단식투쟁은 계속되었다. 5월 1일 전국에서 모인 40여 명의 신부와 개신교 인사, 양심 인사 500여 명이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에서 전국농민인권위원회를 결성하고, 구속 중인 회원 석방과 농민회 탄압 중지를 요구하였다. 다음 날 이상국과 조봉훈이 석방되면서 단식농성을 끝냈다.

▲ 1978년의 함평 고구마피해 보상운동.(사진 제공 = 가톨릭 농민회)
하지만 단식 8일 만에 얻어낸 피해 보상금은 피해 농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피해 보상을 요구해 왔던 가농회원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었다.

1970년대 농민운동은 함평 고구마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들은 이 투쟁을 통해 단식 8일 만에 농협을 굴복시키고 고구마 피해에 대해 보상을 받아냈다. 이 투쟁을 계기로 가톨릭농민회가 농민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되었고 이후 가농은 1990년대까지 농민운동의 견인차로 투쟁을 이끌었다.

거의 4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끄집어내어 서술하는 현재의 상황은 실로 착잡하다. 역사의 발전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하는 반역사적이고 몰역사적 정권에 의해 그동안 어렵게 쌓아 올린 민주주의가 조롱당하고 질식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정통성을 결여한 당시의 정권은 그나마 민주화세력의 투쟁에 짐짓 반응하는 시늉이라도 냈는데, 지금 저쪽은 더 교활하고 강고해진 반면 이쪽은 지리멸렬하다.

전국의 대학교수와 연구자 2000여 명이 지난 10월 29일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제2의 유신이며 우리가 피 흘려 만들어 온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며 “역사 지식은 남겨진 사료에 우리의 합리적 지성을 투여해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얻어진 개연성의 지식이므로 누구도 자신만 진실이라고 믿는 역사 지식을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없다.” 고 밝혔다. 국정교과서 시대가 도래한다면 천주교의 찬란했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도 어느 날 파쇄기에 잘게 썰려 쓰레기통에 버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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