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와 민주화운동]

한국 가톨릭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정권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일명 오원춘 사건으로 불리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다.

1970년대 후반 한국경제는 전반적 인플레, 임금상승, 농산물 가격 파동 등을 겪으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저가 농산물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국가의 정책목표인 저가 농산물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행정기관의 강제적인 정책집행이 빈번했고, 이 과정에서 국가 말단 행정기관과 농민들의 충돌이 잦았다. 국가 말단 행정기관과 농협 등은 농업 현실과 농촌의 삶의 주체인 농민들의 의사는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신품종 보급, 새마을사업, 영농 독려, 농협 출자 강요 등을 실시함으로써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 2012년 4월 정호경 신부의 장례 미사에 참석한 오원춘 씨. ⓒ지금여기 자료사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도 이런 배경 아래 정부의 소득증대 사업에 따른 신품종 보급에서 출발하였다. 1978년 가을 경북 영양군은 농민들에게 가을 감자를 심어 소득증대를 권장하며 ‘시마바라’라는 씨감자를 50킬로그램 1포당 8000원에 배급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받아 심은 씨감자에서는 거의 싹이 트지 않았다. 농민들은 감자를 심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에 분노하여 피해보상을 요구하였으나 당국은 보상 대책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가톨릭농민회 청기 분회장으로 농민운동을 지도하던 오원춘은 ‘청기면 감자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당국의 갖은 공갈과 협박,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안동교구 사제들과 협력하여 34농가의 피해보상을 받아 냈다. 이후 오원춘은 지방 농정 당국으로부터 ‘골치 아픈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 두봉 주교. ⓒ지금여기 자료사진
그런데 1979년 5월 5일 감자 피해보상 활동에 앞장섰던 오원춘이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에게 납치되어 울릉도에 감금되었다가 5월 19일 집으로 돌아왔다. 납치와 테러 사실을 교회에 보고하기까지 상당한 위협을 느꼈던 오원춘은 고민 끝에 6월 13일 영양 본당 정희욱 신부에게 알리고, 7월 5일 농민운동을 위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양심선언을 하였다. 이에 두봉 주교가 교구장인 안동교구는 7월 17일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제작하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하여 이 사건을 전국에 폭로하였으며, 오원춘 사건에 대한 경찰의 답변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정평위도 농민 생존권과 교권수호를 위해 ‘안동교구 오원춘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7월 25일 가톨릭 안동교구는 오원춘 납치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경북도경은 안동교구가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오원춘과 정호경 신부 및 정재돈 안동교구 가농 총무 등을 연행하여 대공분실에 감금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이에 격분한 가톨릭은 8월 6일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신부 120명 신자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기도회를 열었다. 김 추기경은 기도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기 위해”라는 제목으로 강론하였다. 그는 강론에서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교황 레오 13세가 반포한 회칙 “노동헌장”과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를 인용하면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인격”이며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빛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고 사회 속의 누룩이 되어서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며 “안동 농민회 사건에 대해 깊은 아픔을 느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의무임을 밝혔다.

▲ 생전의 정호경 신부. 오랫동안 가톨릭농민회 전국 지도신부를 맡았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기도회 참가자들은 밤 11시부터 성당에서 나와 가두시위를 하면서 “구속자 석방”,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철폐”, “종교탄압 중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 촛불시위와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 뒤 사제단과 가농회원 80여 명은 20일간 항의농성을 벌이는 한편, 8일간의 단식기도, 가두 촛불시위, 공정 재판 요구 및 집단 방청 활동 등을 전개했고, 명동성당 기도회에는 전국 14개 교구 700여 명의 사제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 측은 오히려 8월 16일 가톨릭농민회에 대한 ‘대통령 특별조사령’이란 것을 공포하여 노골적인 탄압을 시도했다. 한편 각 교구에서도 수많은 기도회에 수만 명이 참여하는 등 군부독재 정권과 천주교회의 대결구도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면전의 양상을 띠었다. 10월 8일 오원춘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구형받았다. 10월 9일 인천에서 열린 ‘제8차 전국 울뜨레야’(가톨릭 신심단체 꾸르실료의 모임)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격려사와 윤공희 대주교의 주제 강론이 모두 오원춘 사건을 일으킨 정부에 대한 비판과 구속자들의 석방요구였다. 이날 참가자 3500여 명이 채택한 “우리의 양심선언”은 민중의 인권수호와 인간화에 대한 강력하고도 절실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10월 14일 천주교 안동교구 사제단은 ‘오원춘 사건 보고서’를 발표하여 경찰 측 발표는 사실과 다르며, 재판 과정에서 경찰의 조작이 폭로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가톨릭농민회와 교회의 적극적인 농민운동이 정부, 사법부, 언론에 의해서 편파, 왜곡된 사건으로 극히 모순된 유신체제의 상황을 증명하였고 동시에 한 농민의 인권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또한 농민운동 차원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극심한 억압구조에서도 교회가 일치하여 결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가톨릭과 유신정권의 대립이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8일 오원춘 사건 관련자는 전원 석방되었다.
 

 
 

어수갑(다니엘)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출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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