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SBS> 드라마 ‘용팔이’는 현재 유일하게 시청률 20퍼센트 대를 기록하는 초인기작이다. 요즘 지상파 시청률은 10퍼센트를 넘기는 드라마도 워낙 드물기 때문이다. 방영 초반에는 김태희가 주인공인데 대사도 없이 누워만 있다고 핀잔을 들었다. 하지만 김태희는 주인공 노릇을 톡톡히 했다. 누워 있는 자태만으로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시청률은 연일 상승했다.

절대 권력의 상속녀는 말하자면 숨만 쉬는 상태로 누워있었다. 재벌의 딸이 자기네 기업에 속한 병원의 특실에 갇히게 된 사연도 대단히 기구했다. 경쟁기업의 아들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려다 자동차 사고로 약혼자는 즉사한다. 혼자 살아남았으나 아버지를 증오하며 투신자살을 시도, 아버지인 회장은 암투병 중인 자신이 죽거든 딸을 혼수상태에서 깨우라고 지시한 채 일종의 거대한 캡슐 같은 특실을 만든다.

상속녀는 돈과 의술과 하수인들의 충성과 보살핌(혹은 치밀한 음모와 암투)으로 “3년간 누워 지냈는데도 욕창 하나 없”는 상태였다. 이런 한여진(김태희 분)의 특실에 외과의 김태현(주원 분)이 배정 받는다. 동생 치료비 때문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용한 돌팔이’다. 왕진에 장소불문, 환자불문이 원칙이다. 돈만 많이 준다면 조폭도 몰래 수술해 준다. 그는 환자를 가릴 처지가 아니다. 동생 치료비를 위해 그의 돈벌이는 거의 전쟁터를 누비듯 험한 꼴도 마다할 수 없다. 사정상 신원을 밝히고 병원에 올 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대신 환자나 의뢰인의 비밀은 철저히 지키고, 실력은 최고다. 태현의 말들에는 이런 자신감이 묻어난다. “절대 그런 일 없어. 내 수술대에서는 아무도 안 죽어. 나 용팔이야.”

▲ 드라마 용팔이.(사진 출처 = SBS 홈페이지>

용팔이가 흰 원피스의 ‘공주’를 처음 대면하던 순간은 가히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상케 했다. 아무 대사 없이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과연 공주는 깨어날 것인가. 가난과 폭력과 슬픔으로 얼룩진 유년의 기억뿐인 외톨이 소년. 이를 악물고 의사가 되긴 했으나 친구 하나 없는 상처투성이의 ‘용팔이’는 잠자는 공주님과 어떤 관계로 엮일 것인가. 과연 ‘멜로’가 가능할 것인가. SBS 수목극 ‘용팔이’는 이런 기대감을 주었고 상황은 매순간 삶과 죽음의 살얼음판을 오갔다. 대단히 극적이었다. 사람을 많이 죽이거나 잔인해서만은 아니었다. 초반 이야기 구성이 꽤나 탄탄했다. 결과는 시청률 대박이었다.

주원의 활약으로 드라마는 연일 화제였고, 5회에서 드디어 상속녀는 일어난다. 순간 시청률은 정점을 찍었다. 눈을 뜬 그녀는 너무 예뻤다. 그저 눈을 맞추고 대꾸를 하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정말 기발하고 아름다운 ‘스펙터클 멜로’가 탄생하는 듯싶었다. 아니 멜로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우연의 부산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용팔이의 이중생활과 병원을 배경으로 얽히고설킨 뒷거래들, 경영권과 이윤을 둘러싼 탐욕과 암투야말로 깊고도 넓은 드라마의 반경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의 연기력과 화려한 액션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곧 표절 의혹이 터져 나왔다. ‘용팔이’와 만화 ‘도시정벌7’의 유사성이 제기된 것이다. 용한 돌팔이와 잠자는 상속녀, 이게 ‘만화방’의 전설 같은 신형빈 작가의 “도시정벌” 속에 이미 있는 에피소드라는 얘기다. 만화방 특히 “도시정벌”의 단골 고객은 남성들이고, TV드라마의 단골은 여성들이라는 (어찌 보면 현격한)차이가 있을 뿐이다. 제작사는 “전체 그림을 무시한 채 일부 단면을 가지고 같은 내용이라고 주장하는 흠집 내기”라며 즉각 반발했지만, 어쨌든 ‘유사성’은 인정한 셈이다.

사실 드라마 표절 시비는 너무 잦은 일이며, ‘용팔이’ 직전에 편성됐던 <SBS> ‘가면’과 <KBS2> ‘너를 기억해’는 가장 최근의 사례다. 일단 ‘원작’으로 거론되는 작품과 주요 설정과 뼈대가 비슷하다는 것만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초반에 (이미 흥행한 콘텐츠에서 따온)파격적인 설정으로 시선을 잡고, 표절 의혹이 터지면 줄거리를 바꾸는 식의 드라마가 너무나 많았다. 아이디어 사용임을 밝히고 떳떳이 제작하면, 이야기도 더 탄탄해지고 모두가 상생할 수 있어 좋을 텐데 다들 그러지 않는다.

표절 의혹이 논란이 되면서, 드라마는 그토록 거침없던 용팔이의 활약을 ‘멜로’와 다정함의 틀 안으로 밀어 넣게 되었다. 초반의 그 고생은 재벌가의 일원이 되는 순간 끝났기 때문인가. 돈 걱정이 없어지자 용팔이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의사라는 정체성도 별 의미가 없어졌다. 한여진의 남자이자 그룹 회장의 남편으로서 유일한 ‘정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고뇌할 뿐이다. 반면 용팔이의 도움으로 3년 만에 비로소 바깥 구경을 하게 된 한여진은, 한동안 착하게(?) 살 것 같더니 결국은 “나는 악어들의 왕”이라며 냉혹한 복수를 펼친다. 자신의 힘을 회복해 그룹 회장이 된 뒤 ‘다 죽이는’ 피바람을 이끈다. 자신을 죽이려한 이복오빠 한도준(조현재 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나, 고사장(장광 분)에게 자살을 강요해 앙갚음 하는 과정 등으로 극은 후반부와 연장분을 채우고 있다.

이럴 때 언제나 입맛이 쓴 것은 시청자들이다. 처음엔 오랜만에 볼 만한 드라마가 나왔다는 기대감으로 시청했다가, 보던 드라마의 결말을 놓칠 수는 없다는 딜레마로 시청한다는 한탄이 나온다. 초반 논란으로 시청률만 잡아두면 된다는 식의 드라마 기획은 더 이상 없어야하지 않을까. 한때 용팔이라 불리웠던 ‘회장님 부군님’의 하릴없는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허탈하다 못해 쓴웃음이 나온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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