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한국에서 가톨릭교회는 지난 50년간 양적으로 급속도로 성장하며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의 수도회 또한 급속하게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근래에 들어서며 많은 수도회들이 50주년을 맞고 있음은 한국전쟁이후 60년대에 들어서서 많은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인간의 나이 사십이면 불혹이요 오십이면 지천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50여 년을 산 한국의 수도회들은 하늘의 이치를 잘 알아차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늘의 법에 맞게 지천명의 상태로 살아가고 행동하는가? 팽창된 풍선이 외부의 압력에 쉽게 터지는 것처럼 지나친 팽창으로 건드리면 터질 듯 얇디얇아진 껍질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교회는 수많은 전대사를 발표하고 그에 발 맞춰 전대사 받을 곳을 찾아다니는 이들을 쉽게 만난다. 거듭되는 전대사 조건들의 발표를 보면서 중세의 면죄부 판매가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나에게 ‘각자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은총도 주어지지 않는 것’같은 자본주의 논리에 맞춘 행위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네가 노력한 만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거저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총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힘없는 존재들, 말없이 착취당해 온 자연, 억압 속에서 고통당해 온 이들이 창조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교회와 수도회는 노력하고 있는가? 그보다 내 자신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시대적 요청을 알아듣고 성찰하며 개선을 위해 제대로 응답하려는 노력은 얼마만큼 하고 있고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일까?

▲ 지난 7월 13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열린 ‘봉헌생활의 해 심포지엄’. ⓒ정현진 기자

나는 이러한 성찰거리들을 대할 때 억압과 고통을 조장해 온 세계의 구조적 불의와 단호히 이별하고 대안적 삶을 통해 창조의 본성을 찾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맞갖는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임이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각자에게 맡겨진 책무와 역량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또한 그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이 어떠한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깊은 숙고와 성찰과 행동! 그것은 예수님의 행보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행동하도록, 매 순간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성찬의 나눔과 섭리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순간, 복음의 기쁨이 샘솟아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특징일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예수 공동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은 예수의 한 몸에 참여한 각각의 지체로서 하느님 나라를 일궈가는 평등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바로 억압과 차별과 불평등한 옛 질서와 결별하고 평등과 정의와 나눔의 새로운 질서로 생명을 일구기 위해서였다. 차별과 억압을 당하는 피조물들이 진정한 존엄성을 회복하는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다.

복음에 깊이 귀 기울이고 예수로 인해 이루어진 질서와 공동체와 생명성을 인식하면 진정성을 품은 행동을 이끌어 낼 것이다. 진정성을 품은 행동은 공동선을 이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부패가 만연해 순진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존엄성이 훼손되어 가고 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잘못 채운 단추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든 옷깃을 맞추려 한다면 그 옷깃이 온전한 꼴로 여며지기 어렵다. 옷깃에 잘못 채워진 단추를 다시 풀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새롭게 채워갈 용기가 있다면 바로입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아닐 것이다. 잘못 채워진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아니 인식하면서도 모르는 척 서둘러 나머지 단추를 채우는 데에만 에너지를 쏟는 것은 복된 생활을 빼앗고 조직 쇄신의 기회마저 잃게 만든다.

하늘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가을이다. 결실의 계절인 이 가을에 생각해 보자. 한국교회의 가을은 어떤 모습인가? 한국 수도회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각자가 처한 우리네 인생의 가을은 어떻게 맞이하고 겨울을 준비하나....

너무 늦지 않은 준비의 계절이길 기도한다. 지속 가능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구공동체 위기의 시대의 절박한 현실을 내 자신의 전대사만을 위해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깊은 성찰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최상의 밑바탕이 된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때 영원한 사랑에 대한 희망이 차올라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세상의 어려움과 연대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세상의 끝자락에서 외롭게 분투하는 이들의 삶에 희망과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짙은 이 가을에 저항과 기억을 바탕으로 생명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모색해 보면 좋겠다.
(전대사: 교회가 정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에게 잠벌을 모두 없애 주는 것)

 

 
 

이진영 수녀(체칠리아)
사랑의 씨튼수녀회 수녀
인천새터민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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