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센터에 자주 놀러오는 두 아이가 있다. 여섯 살, 일곱 살이 된 그들은 형제인데 생김도 다르고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또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다. 한 친구는 떡볶이를 좋아하고 한 친구는 김밥을 무지 좋아한다. 잘 놀다가도 금새 티격태격 싸우고 또 금세 화해한다. 큰 아이는 자존심이 강해서 잘못했다는 말을 잘 하지 않고, 둘째는 본인이 잘못한 일이 생기면 정중한 낯빛으로 얼른 “미안합니다~” 라고 말한다. 너무나 다르게 반응하는 아이들이지만 누군가 다른 친구와 말다툼이 벌어지면 어느 새 한편이 되어 대적한다. “우리 형! 내 동생!”하면서.... 한 핏줄 한 가족이기에 어떠한 계산이나 이성이 발동하기 전에 한편을 먹고 있는 모양새에 지켜보던 이들이 한바탕 웃곤 한다.

▲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지금 판문점에서 고위급 만남이 진행되고 있다. 한 핏줄,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헐뜯고 싸우고 갈라져 산 세월이 70년이나 된다. 한 겨레이기에 그저 말하지 않아도 한편이 되면 안 되는 것인가? 성경에 인간의 수명은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이라고 했다. 물론 지금은 백세 시대라고들 한다. 그래야 고작 한 세기를 살다가지 않는가? 모두들 그 사실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끊임없이 축적하고 하나라도 더 가지겠다고 싸운다. 그러는 사이에 인간들의 욕심으로 정작 놓쳐서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어떤 나라(키지라시)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고 지구는 열 받아 온도가 계속 오르고 있다. 마치 구멍 뚫린 배를 타고 앉아서 이쪽에는 구멍이 뚫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고 안심하고 있는 꼴이 지금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9월 1일을 피조물을 위한 기도의 날로 정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에 이어 마음을 모아 창조물들의 연대를 말씀하신다. 또 이날의 제정은 동방정교회와의 일치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소통을 위한 발걸음이 지구와 우주 속에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연대로 나아가고 있다. 깊이 있는 ‘들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반해 한반도의 남북 간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에도 군사훈련과 적대감은 한층 고조되고 있는 듯하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좀 더 멀리 넓게 바라볼 수는 없을까? 예수께서는 지금의 한반도 정세와 지구의 정세를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소통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면 그것이 소통인가? 차근차근하게 짚어볼 것은 짚어보되 상대를 듣고 또 나를 듣는 것이 소통의 첫걸음일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듣고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논리를 넘어서기에.... 그렇지만 보편적인 창조물들의 깊이 있는 만남은 상대에 귀 기울임이고 들음에서 비롯된다. 그 깊이 있는 만남은 에너지가 되고 생명력이 되어 서로를 성장시킨다. 선의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들어 존중하고 격려할 때 화해하는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로 거듭나 생명력 있는 사회를 이룰 것이다.

바쁘고 급하다는 이유로 숙고하고 깊이 있게 듣기보다 내게 보여지는 부분만을 내가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만 보고, 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일편적인 경험에 비추어 상대를 추론하고 짐작하여 판단하는 일이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만큼을 차지하고 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좀 더 깊이 있게 보려 하고 멀리 보려 한다면 점점 왜곡은 줄어들고 자연스러운 생명의 호흡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진영 수녀(체칠리아)
사랑의 씨튼수녀회 수녀
인천새터민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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