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2]

지난번에 종교 갈등을 다뤘으니 이제 종교 평화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한국에서 종교 평화는 종교 간에 ‘현상 유지’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흔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종교 간에 별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평화에는 이런 차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들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소속 신자들에게 다른 교파 또는 이웃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상태’와 같은 적극적이고 고차원적인 단계도 있다. 종교평화는 이 양극단을 포함,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제도화된 종교들이 이 적극적 평화를 실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종교 평화는 ‘현상 유지’와 이 ‘적극적 평화’의 바로 아래단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리키는 상태라 보아야 한다.

한국의 종교는 현재 겉으로만 평화로울 뿐 속으로는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지속되는 상태에 있다. 현재는 소강 상태지만 장로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 간 관계가 제법 시끄러웠다. 김영삼 장로 대통령 시절에는 조계종에서 두꺼운“종교편향 백서”를 발간할 정도로 일부 개신교도들의 ‘훼불’ 행위가 극성이었다. 이 백서에 실린 훼불행위에는 법당에 불 지르기, 벽화에 페인트 뿌리기, 불교 유적에 붉은 십자가 그리기, 길가는 승려 조롱하기, 불상 파손하기, 군부대에서 특정 종파 밀어 주기, 휴가 군인들이 공공장소에서 거리 선교하기 등 다양하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훼불행위를 하다 현행범으로 붙잡혔는데도 누구 하나 처벌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 짓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터다.

▲ 2011년 11월 부산 개운사에서 일어난 훼불 사건. 불상의 얼굴에 붉은 스프레이로 'X'자를 그렸다.(사진 출처 = blog.naver.com/zskmc/90129355592)

이명박 장로 대통령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훼불행위가 ‘땅 밟기’ 정도에 불과했지만 정부 고위관료 수준에서는 차별이 교묘하게 이뤄졌다. 일례로, 공공기관이 만드는 지도에 작은 교회는 다 표시해 주면서 유명 대형 사찰은 의도적으로 빼먹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정권 초기의 일이다. 개신교계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불교를 공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호가호위한다고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데 힘입어 일부 중소도시 시장들이 자기 소유도 아닌 동네를 성시화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항상 보수정권 편을 들었던 불교가 이런 일들로 대규모 시위를 벌일 정도였으니 차별 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 터. 그나마 불교는 한국의 최대 종단이라 무력시위라도 할 수 있었지, 단군계 신흥종교나 무속은 당해도 감히 대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행히 한국 사회는 이런 종교간 갈등에 대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종교 갈등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수단이 돼 왔다. 연구자들은 이런 상황이 한국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분석했다.

먼저, 속칭 종교인구의 황금분할 구도라 부르는 종교인구 분포가 첫 번째 배경이다. 이를테면,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나라 가운데 자기가 종교인임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사람이 인구의 절반에 불과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종교인 가운데 특정 종교인구가 과반을 차지하지 않는 것도 원인이다. 남한 인구가 5000만 명이면 종교 인구가 2500만 명인데, 이 2500백만 명 가운데 어느 종파도 1250만 명을 넘기지 못한다. 개신교가 1300만 개신교인을 늘 외쳐 왔으나 ‘2005년 인구총조사’ 결과 900만 명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교도 비슷한 주장을 펼쳐 왔으나 역시 당시 조사에서 과반을 넘기지 못하였다. 이러한 구도 때문에 어느 종파도 전횡을 일삼기 어렵다. 국교가 있는 나라나 특정 종파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일방적 차별행위가 자주 나타나는 것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한국인이 가진 다원적 종교의식이다. 심층의식은 무교, 세계관은 불교, 생활윤리는 유교, 표면은 그리스도교라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다원성이 높다. 일부 개신교인들이 예외일 뿐 다수 한국인의 사정이 다 비슷하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고 하는 배타주의를 잘 견디지 못한다. 종교 갈등이 존재할 때마다 이런 의식이 작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표면적 갈등이 잘 억제돼 왔다. 물론 이 상태는 갈등을 잠복시킬 뿐 근본적 해결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정교분리제도가 형식적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이 일어나도 불교와 같은 전통적 우군과 거리가 생기는 정도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마지노선이다. 따라서 공권력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종교 갈등에 개입할 수 있다.

이런 세 가지 특수성 때문에 한국에서 종교평화가 형식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압력요인들은 갈등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불교계에서 그동안 계속 문제제기를 해 왔던 측면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개신교인들이 고위공직자, 정치인, 경제인, 대학교수, 그리고 전문직 종사자들 가운데 평균 개신교 인구 비율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면서 미치는 영향이 표면적 갈등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자원을 통해 교묘하게 가하는 공격과 차별이 더 위험하고 강도가 높다는 말이다. 사실 갈등이 이렇게 수면 밑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거의 눈치 챌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갈등은 광복 뒤부터 70년 간 계속돼 왔다. 불교신자의 계층적 구성이 현재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 이러한 수면 밑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인 서울중앙성원.(사진 출처 = 한국이슬람교 홈페이지)

그러면 불교 입장에서 천주교는 갈등의 당사자가 아닌가? 아마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어느 자리에서나 천주교는 불교와 개신교의 중재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으로 오면서 불교가 천주교도 갈등의 당사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포착된다. 아마 두 종단의 이권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불교가 갖는 상대적 박탈감이 원인일 터다.

그러면 앞으로는 종교 평화가 유지될까? 현재 흐름으로 보면 개신교는 불교와 전통 종교 외에도 새로운 타자를 공격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 일차 대상이 이슬람교인이다. 자생 이슬람교인(내국인 출신)은 적지만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들까지 포함할 경우 이슬람은 교세 면에서 원불교를 제치고 한국의 4대 종파다.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이슬람을 타자화하는 움직임이 개신교계에서 포착되고 있다. 이슬람교인 인구가 더 늘어나면 갈등이 표면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개신교인들이 이슬람교인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억제해 온 공격성을 드러낼 것이다. 이런 경우가 생겨서는 안 되겠지만 만일 이슬람교인들이 공격적으로 대응한다면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보지 못했던 공격적인 갈등 유형들이 나타날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 한국의 종교 평화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위장평화의 상태라 할 것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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