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0]

1.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좌에 올랐을 때 신자를 비롯해 세계인이 그에게 보낸 환호를 기억한다. 그가 작년 한국 땅을 밟았을 때 한국인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했던 일도 기억에 또렷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그런 기억은 일상의 무게에 눌려 버린 느낌이다.

2. 처음부터 환호가 큰 경우일수록 시간의 압력을 버텨 내기 힘들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이성이 아니라 감각에 기반을 둔 경험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극의 강도가 떨어지는 까닭이다. 감각적 경험은 갈수록 강한 자극이 주어져야 처음 상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커피의 역설’과 닮아 있다.

처음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 준 파격적 모습은 이성보다는 대중들의 감각에 먼저 소구하였다. 한동안 이어진 새 교황의 남다른 행보는 대중의 감각적 소구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좌에 오른 지 이년 반이 가까운 지금 이 감각은 무뎌지고 그의 카리스마는 빠르게 ‘일상화’(routinization) 되었다. 눈 밝은 이들은 이런 사태를 처음부터 예상했을 터.

▲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광장 시복식에 앞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 어린 아이에게 강복하고 있다.(사진 제공 = 교황방한위원회)

3. 자기 스스로 쌓은 노력 없이는 어떤 외부 자극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 경험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았을 때 감각적 증거를 요구하였다. “나는 그분의 손 안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제자 토마스의 말이지만 이 말이 그의 생각만은 아니었다. 결국 예수님은 부활 뒤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을 설득하고 확신시켜야 했다. 아주 강력한 자극도 확신에 이르기까지 이리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극들이랴!

4. 나는 한국교회가 교황 맞는 일을 일 혹은 행사로 생각했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많은 신자들이 교황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이 가운데 상당수는 대중의 환호, 열광에 편승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기의 순수성, 진실성을 재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열매인데, 교회가 지금처럼 조용한 것을 보면 열매가 아주 작은 상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열매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열매는 있으니 말이다.

우선 다수 신자들이 신앙 쇄신을 결심하였다. 교회에서조차 환영하지 않던 정의평화 활동은 교황의 말과 행동으로 작지만 정당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어느 주교는 차의 배기량을 낮추고, 교황 노선을 따르는 중장기 사목 정책을 수립하였다. 필요하고 옳은 일이면 기꺼이 투신하겠다는 수도자들이 늘었다. 결코 작지 않은 쇄신의 표지이자 열매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대부분 이전부터 이런 고민을 해 오던 이들이다. 각자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새로운 도전이 왔고 그에 응답했을 뿐이다. 다만 이런 이들이 소수였는데 교황 덕에 이 규모가 조금이나마 더 커진 것이 열매라 하겠다.

5. 이제 교황에 대한 환호는 더 이상 커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처음 환호가 컸던 만큼 오히려 비판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파격적 행보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처음 말과 이후 보여 주는 행동의 괴리가 더 커질지 모르겠다. 교회의 수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예언직무 말고도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입만 바라보아선 곤란하다.

교회 쇄신은 그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할 것이다. 그와 정반대의 노선에 있는 교황이 등장해도 그의 생각과 상관없이 교회 쇄신은 계속되어야 한다. 애초 교회쇄신은 모든 신자의 의무였기에 교황의 말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

교황이 좋은 교황으로 남도록 도와주는 일은 그의 입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제 할 도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신자의 모범을 남기는 것이다. 이제 교황만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볼 일이다. 이것이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의 일상화’의 참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황의 어깨를 진정 가볍게 해 주는 일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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