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1]

서울 합정동에는 절두산 성지가 있다. 200년 전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공간화한 흔적이다. 이렇게 공간화 된 기억은 다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며 역사화 된다.

최근 서울대교구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일주년을 기념하여 광화문 광장에 동판을 설치했다. 이뿐 아니라 다른 교구들에서도 기억을 공간화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굳이 이 주제를 다루고 싶은 이유는 최근 들어 이러한 작업들이 종교간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경우들이 발생하고 있어서다. 가장 최근의 예가 주어사 터를 둘러싼 조계종과의 갈등, 서소문 성지 개발을 둘러싼 동학(천도교)과의 갈등이다. 과연 이 갈등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떻게 푸는 것이 좋을까? 짧지만 내 생각을 나누고 싶다.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이유

특정 집단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의도가 있다.

첫째, 그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집단의 현재가 과거보다 화려하면 지금의 성공을 더 빛나 보이게 하고픈 욕망 때문에. 현재가 과거보다 못하면 영화로운 과거를 통해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어서. 아마 전자는 다른 집단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남에게 과시하고 싶을 때다. 지금의 모습이 우연 때문이 아니라 나름 이유가 있었음을 내비치고 싶은 경우다. 이런 의도가 앞서면 공간의 규모가 커지거나 높아지거나 화려해진다. 정도가 과하면 경쟁하는 다른 집단들의 경쟁심 혹은 시기심을 부추긴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신자 공동체’ 사화가 교회사에서 매번 소환되는 것처럼 그 집단이 본래 정신대로 살고 싶은 경우다.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을 시복시성하고, 치명지를 성지화하려는 시도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목적의식이 앞서면 경쟁 집단을 자극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해당 집단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일이 추진되는 당시 맥락에 따라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테면, 본인은 과시할 의도가 없는데 다른 집단이 이를 도발로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 일을 추진하는 대부분의 집단은 자신들에게 이런 의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남에게 그리 말할 터이다. 사실 이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자기에게 이런 의도가 없고, 법적으로나 다른 차원에서 하자가 없다고 추진하는 일이 모두 정당화되는가? 그리고 굳이 기억을 공간화하는 방식으로만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가?

▲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당시 서소문 성지에서 참배하고 있다. ⓒ교황방한위원회


기억의 공간화를 둘러싼 종교 간 갈등의 원인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주의가 필요하다’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는 ‘다른 방식도 많다’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굳이 다른 집단을 자극하면서까지 대규모 개발을 할 필요는 없다. 대신 상대방도 인정해 줄 만한 방식으로 기억을 공간화해야 한다. 그래서 이웃 종교들이 소박하고 참신하게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가 나의 생각이다. 하나를 덧붙이면 ‘굳이 해야 한다면 남의 돈, 특히 국가(지자체 포함)의 돈을 받지 말고 교회 돈으로 한다’가 되겠다.

마지막에 덧붙인 생각에 대해서부터 이유를 생각해 본다. 한국에서 종교 간 갈등은 내막을 들여다볼 때 크게 네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고 있다.

첫째, 정부의 종교문화재 예산지원뿐 아니라 종교정책이 천주교 개신교 불교와 같이 교세가 큰 종단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교세는 작으나 서원, 향교 등과 같이 오래된 건축물들이 많아 제법 큰 지원을 받는 유교는 예외다. 정부는 신자 수에 비례해 예산을 배정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라 생각해 그리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종단들은 이를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정부예산 배정에 흑막이 있는 경우를 보게 되면 정부와 해당 종단 모두를 공격한다.

둘째, 거대 종단들이 다른 의도를 갖지 않아도 앞의 예산지원처럼 관행(기득권)의 덕을 보는 경우가 많다 보니 소수 종단들은 이에 대해 늘 피해의식을 갖기 마련이다. 어느 종단이든 교세를 떠나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고 대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눈에는 당사자들(거대 종단)이 별 의식 없이 행동하는 모습에서도 피해 의식을 느끼게 된다.

셋째, 둘째와 같은 맥락인데 강자는 아무래도 약자의 처지였던 때를 쉽게 잊기 마련이다. 우리도 박해받는 소수로 출발하였으니 한국의 이슬람인들이나 소수 종단들의 아픔을 헤아릴 법도 한데 이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다. 해서 자신은 처지에 맞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데, 군소종단 또는 대등한 힘을 가진 종단들은 이를 과시로 느낀다. 대등한 종단인 경우에는 이러한 모습에 경쟁심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바르게 행동하지 못한 경우들도(정부에서 특혜를 받는 경우) 있으니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종무행정에 일관성이 없어서다. 요즘 흔히 말하는 ‘비정상의 정상화’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종단이 바르지 않으면 정부라도 바르게 해야 하는데, 이미 오래 전부터 원칙이 없었던 데다 정권에 따라 편파적으로 지원하다 보니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행들을 종단이나 정부 어느 쪽에서도 개선할 의지가 없다. 이 경우 이제까지의 관행을 모두 중지하고 새롭게 판을 짜야 하는데 이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결국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니 현상이 유지되고, 자연스럽게 기득권을 가진 종단이 계속 기득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상대방이 무어라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먼저 낮추는 일을 도리라 생각해야 한다. 어쩌다 보니 이 설명이 첫 번째 주장에 대한 답변이 돼 버렸다.

기억의 역사화를 위한 방향 제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보충해 본다. 놀랍게도 내가 보태고 싶은 생각을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작년 8월 14일 한국 주교들과 만났을 때 하신 그분의 연설이다.

교황은 이 연설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셨다. 직접 인용해 본다. 먼저, 기억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국주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기억에서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특히 이 인용구에서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미 우리는 의도와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승리자’로 인정받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다른 집단들은 당연히 ‘승리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오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교황이 한국교회의 할 일이라 제안하신 내용이다. 교황은 우리가 할 일이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일이라 하였다.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희망)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 연대를 실행하여,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복음의 중심에 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황의 이 말씀이 내가 앞에서 던진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말씀처럼 순교의 기억을 오늘에 소환하려면 ‘기억을 공간화’하는 일 보다 그 당시 순교자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오늘날 몸소 실천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 5월 21일 열린 '서소문공원 역사적 가치발굴 학술토론회'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문수 이사. ⓒ강한 기자

지난번 서소문 성지개발 논란으로 동학(사실상 천도교) 인사들과 토론회를 했을 때(2015. 05. 21) 나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천주교는 이미 서소문 공원에다 조형물을 세워 ‘기억을 공간화’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중구청이 계획하는 대로 개발을 진행하면 명실 공히 이 지역의 역사는 천주교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천주교도들의 순교지인 ‘뚜께 우물터’ 외에도 서소문 밖 넓은 지역이 천주교 역사로 편입되어, 이 공간에 대한 기억이 후손들에게 천주교만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소환된 과거가 현재 우리 입장(또는 우리가 갖고 있는 힘)에 따라 해석되고, 해석된 이 입장이 다시 공간에 반영되어 역사화되면 천주교 것이 아닌 다른 많은 기억들이 묻히게 되리라는 주장인 셈이다. 물론 이 말은 다소 과장돼 있다. 그렇지만 새겨들을 만한 내용도 있다. 우리가 그들에겐 강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강자의 자연스러운 행동도 약자에게는 큰 위협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순교 때 처지를 생각하며 현재의 약자들을 의식하는 일, 그리고 그에 걸맞게 기억을 공간화할 때 소박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도 굳이 공간화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목이 창의성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제까지는 크고 넓고 깨끗하고 예술적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공간을 만드는데 공을 들여 왔다. 그런데 수입이 줄어들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방향을 따라야 할까?

앞의 주장대로라면 이렇게 크고 넓고 예술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향이 되어선 곤란하다. 작은 초석 하나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꾸미기보다 소박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공간이 화려하고 잘 정비되어 있을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비석에 새겨진 순교 사실 외에 무엇을 더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황님의 권고대로 이 시대를 순교 시대로 생각하고 낮은 자리에 임해 새로운 기억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공간을 넘어 시간까지 우리의 기억이 확장될 것이다.

이 때문에 교황은 당시 순교자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을 좇아 지금 이 시대에도 그 시대와 같은 상황과 조건에서 순교자와 같은 태도로 살아 보려 노력하는 것이 ‘기억의 지킴이’가 해야 할 일이라 하였다. 더구나 이웃 종교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저 무한한 상상을 자아내는, 기억이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방식으로 소환되는 방식이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선택이 미래의 기억이 될 것임을 감안해 후손들이 지금 우리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기 바라는지를 기준으로 행동하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우리 돈으로 해야 한다’에 대한 주장의 보충이다. 사실 종교간 갈등의 직접 원인은 정부 예산에 있다. 적게 쓰나 많이 쓰나 우리는 특혜 시비에 휘말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기억을 되살리는 일인데 국가 재정을 사용해야 하겠는가? 우리 돈으로 작게, 그러나 방금 말한 대로 창의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이면 되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의 모습은 미래 우리 후손들의 역사다. 기억을 공간화하고, 또 공간을 역사화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오늘로 소환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과연 순수한가, 다른 감추어진 욕망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스스로 해 보는 것이지만 이를 판정하는 주체는 비신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힘 있는 자들의 횡포라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맹목이면 다행인데, 눈 밝은 이들이라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미래에 어떻게 평가될까? 나 스스로와 교회 모두에게 던져 보는 질문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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