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986년 1월 15일 새벽, 전교 수석을 다투던 한 여중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라며 “로보트, 인형, 돌멩이”처럼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이 열다섯 소녀의 절규를 다행히도 세상은 그냥 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노래와 영화가 만들어졌고, 참담한 자괴감과 성찰 속에 선생님들이 참교육의 기치를 걸기 시작했다. 최루탄 냄새가 온 거리에 흩날리는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학교 담장 안에만 눈을 두고 살던 많은 중고생들은 선생님들의 결기 어린 목소리에 시위와 농성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다. 세상은 함께 분노했고, 함께 소망했다. 다시는 피지 못한 꽃봉오리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1993년 10월 10일 초속 14미터의 강풍 속에 출항한 서해훼리호가 무리한 운항 끝에 전복된다. 배에 있던 9개의 구명정 중에 작동된 것은 단 둘, 아이스박스며 널판을 붙들고 살아 보려던 승객들은 구조의 손길이 미처 닿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해경과 구조선은 229명이 수장된 다음에야 허겁지겁 현장에 도착했고, 운항관리 부실, 안전 대신 이윤을 선택한 자본의 민낯을 방송으로 접한 시민들은 국가 구난체계의 어처구니없는 무능력을 확인하며 허탈감에 떨어야 했다. 눈 있고 귀 있는 사람이라면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국가의 초상이었다.

▲ 1995년 6월 29일 무너진 삼풍백화점.(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충격을 경험한 세대의 지금 상황

제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할지라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은 그 밖에도 많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폭발 사고가 그랬다. 몸서리나는 고문 속에 눈을 감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그랬다. 원하든 말든 같은 시대를 겪으면 공유할 수밖에 없는 기억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그렇게 억울한 죽음과 희생을 함께 목격하고 분노하고 소망하면서 21세기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불의의 목격자들이 만들고 꾸려가는 오늘은 어떠한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눈물짓던 소년소녀들은 어느새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를 달달 외는 학부모가 되었고, 국가와 자본의 허장성세를 꿰뚫어 본 당시의 중년은 세월호 유가족의 절규 앞에 못마땅한 눈을 흘기는 노년이 되었다. 위법한 수단으로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시민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정보기관의 월권과 횡포쯤은 애국심으로 눈감아 줄 수 있는 노회한 세대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책을 넘길 때마다 눈물 흐르는 소리, 고통의 신음소리,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일반적인 살인이라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고 일갈했지만, 눈물, 신음, 살인을 제 눈앞에 목격한 이들의 철학이 언제나 진실을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인간이란 원래 잘 바뀌지 않으며, 세상은 어쨌거나 승자만을 기억하더라는 경험칙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았다. 진실보다는 무관심 속에 각자도생의 길을 걷는 편이 훨씬 안락하다는 철학을 몸으로 익혔다. 영국의 좌파 이론가 테리 이글턴이 지적한 대로, 많은 이들이 원죄에 물든 인간만을 시야에 두고 인간의 구원에 눈을 감았다.

오늘도 사회교리를 읽고 실천하려는 이들은 이런 세상의 무심함에 틈을 내고 하나라도 더 알리고 한 사람의 공감이라도 더 얻으려 초인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만, 뭇 사람들이 몰라서 방관하고 안 봐서 무감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광화문광장, 강정에서 희생자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잔인함이 인간의 악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애써 믿으려 하는, 그리하여 교도권의 권위에 호소해서라도 사회 교리를 알리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분명 가치로운 것이다. 하지만 문자화된 텍스트를 알리고 읽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2014년 9월 27일 진행된 강정 평화대행진.ⓒ정현진 기자

성찰은 실천으로도 이루어진다

사회 교리를 공부하려는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신약 성경 조차도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 명쾌하고 반박 불가능한 텍스트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구약 성경의 ‘희년’ 개념이 구원과 해방에 필요한 정치 경제적 조건들을 일찌감치 제시하는 데 반해서, 복음서와 서간들은 인간의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 명쾌한 사회구조적 진단과 대안의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텍스트 이전에 교회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사도 2,45)하던 교회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두꺼운 “간추린 사회교리”를 공부하고 “복음의 기쁨”을 읽는 분이라면, 제주에서 평화의 행렬을 이루고 광화문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활동가들의 삶도 유심히 읽어 주시기 바란다. 원죄에 물든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고 구원을 체험하려는 활동가들의 분투를 봐 주시기 바란다. 신학적 성찰은 텍스트뿐만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박용욱 신부 (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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