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거만하고 냉혹한 지주가 자신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면서 이웃의 궁핍은 전혀 생각지 않고, 수확물 전부를 혼자 소비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의 위는 자신의 욕심보다 훨씬 작다. 고작 소작농의 위와 비슷한 크기일 뿐이다. 지주는 잉여생산물을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하인들에게, 자신과 가족이 소비하는 사치품을 공급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몫은 지주의 사치와 변덕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지, 지주의 인간애나 정의감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중에서)

▲ 스코틀랜드에 있는 애덤 스미스 동상 (사진 출쳐=commons.wikimedia.org)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기심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승화시킨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언뜻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성당에서는 이기심을 단죄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자고 동정심을 자극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동정심이란 가끔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면서 혀를 차거나, 아니면 그들의 빈한한 처지를 관조하면서 나는 적어도 저런 처지가 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무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정심에는 유효기간도 있어서 아무리 안타까운 사연이라 할지라도 내 기분을 계속 꿀꿀하게 만들 정도면 언제든 ‘지겨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세월호참사를 두고 애끓는 부모의 탄원이 지겹다며 귀를 막는 저 차가운 모습들을 보라. 동정심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짧은가.

그러니 위정자들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실 일에 괜히 입대지 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그러니까 인간의 이기심만 합리적으로 잘 발휘하시라는 아류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진 이들이 사치와 변덕으로 과소비를 일삼으면 소비가 촉진되어 경제가 살고 사회 전체의 복리가 증진된다는 이른바 ‘낙수 효과’가 전문가의 고견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예수님의 연민과 동정은 감동적이지만, 너무 이상적인 것도 같다. 대신, 차라리 부인하지 못할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그것이 합리적으로 발현되도록 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은 대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와 현대의 추종자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있다. 지주의 위는 소작농의 위와 비슷한 크기라 할지라도, 자기 위를 넘는 음식을 하수구에 버릴지언정 남의 입에 들어가는 꼴은 못 보겠다는 사특한 마음을 그들은 간과한다. 넘치게 먹고 먹어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남보다 더 먹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이성만으로 살지 않고 비틀린 욕망과 날선 감정으로도 사는 존재다. 그러기에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조차 인간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교만한 인간의 맨얼굴 말이다.

최근 국민 연금이나 사회 복지 논쟁 같은 일련의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가 부를 어떻게 재분배하고 부담을 함께 나눌 것인가, 국가는 국민의 삶을 최소한 어느 선까지 책임질 것인가를 따지는 이 토론을 단순한 동정심과 합리적 경제관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국가의 재화가 강바닥에 쳐 박히고 날림 공사에 묻혀도 아랑곳하지 않던 사람들이 유독 인간을 위해 돈을 쓰는 데는 인색해질 뿐만 아니라, 합리적 경제 논리의 신봉자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더욱이 복지와 최소한의 생활수준 보장을 담보하려는 교회의 사회 교리를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동정심인양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 교리는 단순히 동정심이나 연민의 정 때문에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교리의 기초는 하느님의 법에 있고,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규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본성적으로 평등하게 당신 모상에 따른 창조물로 지어내셨음을 교회는 고백한다.

모든 사람의 참된 주인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에게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다("노동헌장", 57항 참조). 그리고 이 세상은 전인류에게 주신 공동의 재산이다("노동헌장", 14항 참조). 하느님의 창조질서는 이 세상의 모든 재화는 모든 이들이 이용하도록 마련된 것이고, 모든 인간은 이 세상 재화의 한 부분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모든 재화는 공동의 재산으로 관리되어야 하며, 누군가의 입에서 뺏어낸 음식으로 내 위장을 채우는 것은 불가하다. 내가 쓰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일 재화를 탐내는 것은 더더욱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단기간에 국가의 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나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나, 또는 “군비 지출”을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하느님 창조 질서에 도전하는 일이다("어머니와 교사", 69항 참조). 무릇 부의 분배에 관한 유일하고 최종적인 판단 근거는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냐에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부의 분배 문제에 관련된 일련의 토론과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바란다. 경제 논리를 따지려면 일부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이의 이익이 되는지 제대로 따져 보시기를, 그 경제의 근간에 하느님의 법이 먼저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그리고 교회 문헌 좀 읽어 보고 토론하시기를.

박용욱 신부 (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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