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바야흐로 요리사 전성시대다. 아니다. 요리하는 남자의 전성시대라는 게 맞겠다. 단, TV를 통해서 요리 과정을 중계한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요리사들을 ‘셰프’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흐름이다. 요리사들이 요리하는 프로그램이야 예나 지금이나 많았다.

가장 오래된 요리 프로그램 포맷은 젊은 여자 연예인이 나이 지긋한 여성 ‘요리연구가’와 함께 등장해, 초보 주부에게 반찬 만들기의 기본을 차근차근 가르치는 것 같은 ‘오늘의 요리’ 식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는 요리연구가라는 호칭이 최고의 예우였다. 요리 과정도 밑손질 작업들은 미리 준비되어, TV는 일종의 레시피 기능이 주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뭔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남자 요리사들의 개인적인 그리고 직업적인 매력을 예능이 한껏 소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요리사들이 예능 ‘캐릭터’처럼 웃음과 재미를 주는 역할까지 도맡은 것이다. 요리도 요리지만, 그 사람 자체의 장기를 소비한다. 요리를 할 때 하필 그가 보여 주는 어떤 제스처나 특징이 재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섹시한 남자’의 기준마저 ‘요리하는 남자’ 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적어도 TV 속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 6월 15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최현석(왼쪽)과 이연복 요리사.(사진 출처 = SBS 홈페이지 동영상 갈무리)

수년 전 처음 요리하는 남자 열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는 요리사를 바라보는 흥미의 초점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 굉장한 전문가로 대우 받기는 했지만 ‘권위’의 상징으로 엄하고 독한 ‘사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과거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마스터셰프 코리아’에서는 일명 ‘독설’이 강한 요리사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추어 요리사들이 ‘프로 셰프’들에게 주방에서 온갖 꾸중을 들어가며 특훈을 받아 요리사로 성장한다는 포맷에 맞게 심지어 인신공격과 독설들이 판을 쳤다.

지금은 TV가 요리하는 남자들의 ‘예능 감각’에 기대고 있다. 허세로 재미를 줘 일명 허셰프가 된 최현석이 대표적이다.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무림고수 같은 자세지만 헛스윙에 가까운 ‘소금 뿌리기’와 ‘치즈 갈기’ 등을 볼 수 있다. 실상 맛과는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웃어넘기고 나면 왠지 그의 요리가 더 좋아지기도 한다. 허세작렬이라고는 하지만 20년 내공의 요리사로서의 단련된 자세이기에 사실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카리스마도 있다.

▲ "집밥 백선생" 소개 사진.(사진 출처 = tvN 홈페이지)

요리사나 셰프라기 보다는 요식업계의 대박 사업가로 유명했던 백종원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끌며 ‘백주부’라는 별명을 얻은 사례도 있다. 음식점 사업가라는 이미지에서 직접 일상적 요리를 하는 전문 요리쟁이의 느낌을 주며, 자연스럽고 순발력 있는 입담을 보여 준 덕이다. 그의 레시피는 특히 매일 요리를 해야 하는 주부들에게 인기가 높다. 일상의 요리를 파고든 전략이 통했다. 이런 인기로 그는 ‘집밥 백선생’이라는 신설 프로그램까지 맡게 되었다.

현재 JTBC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내공을 자랑하는 셰프가 매회 여덟 명씩 출연해, 초대손님으로 온 연예인의 집 냉장고에 든 재료만으로 신공에 가까운 요리 대결을 펼쳤다. 냉장고에 든 것들만으로 즉석에서 아이디어 경쟁을 한다는 게 포인트였다. 여기에 출연한 십여 명의 셰프들의 인기는 곧 여느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치솟았고,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들을 경쟁적으로 섭외 중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요리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전문가들이었다. 15분 내에 요리하라는 제약이 오히려 그들의 빠른 손놀림과 쌓인 경륜을 한눈에 짐작케 해 주는 풍성한 볼거리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이 어찌나 인기인지, 방송 30여 회를 넘긴 ‘냉장고를 부탁해’는 월요일 밤 심야의 최강자로 자리 잡았다. 지난 6월 15일에는 심지어 동시간대 방송 3사에서 ‘같은 얼굴’들이 겹치기 출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힐링 캠프’는 그날 ‘냉장고를 부탁해’의 대표적 요리사인 이연복 셰프와 최현석 셰프를 집중 조명했고, 같은 시간대의 ‘MBC 스페셜- 별에서 온 셰프들’ 편에서는 ‘냉장고를 부탁해’로 유명세를 탄 거의 모든 인물들이 등장했다. 그날은 채널을 여기를 돌려도 저기를 돌려도 온통 셰프들 뿐이었다. ‘힐링 캠프’를 보면서 나름 눈길이 갔던 것은, 다른 데서 카리스마를 강조하던 최현석이 40년 내공의 이연복 요리사 앞에서는 그야말로 ‘아이’처럼 굴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가 해 주신 요리를 먹으며 행복해 하는 ‘아들’의 순진한 얼굴로 “맛있다”를 연발하던 그는, 타 프로그램에서 잔뜩 폼을 잡던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게 묘한 감동을 주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요리의 한 길을 걸어온 40년 내공의 ‘스승’ 앞에서 ‘스타 셰프’는 그저 더 배워야 할 ‘학생’이었다. 두 사람의 인생 내공이 엿보여 흐뭇하게 시청했다.

'MBC 스페셜‘에서는 요리 자체에 대한 사랑만 유지한다면, 요리에 집중하는 자세든 요리 퍼포먼스까지 소화하는 ‘셰프테이너’든 모두 요리의 저변을 넓히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는 업계 원로들의 덕담도 있었다. 최근 ‘냉장고를 부탁해’가 경력 4년차의 맹기용을 ‘셰프’로 등장시켜, 기존의 쟁쟁한 요리사들과 각축전을 벌이게 하는 와중에 터져 나온 ‘자질 논란’ 등에 대한 시청자의 냉담한 반응도 의식한 듯 조심스러웠다. 부엌에서 보낸 시간이 절대적으로 그의 경륜을 만들어 내는 요리사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생각할 때, 제작진이 맹기용을 ‘막내’로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은 시청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 6월 15일 방송된 "MBC 다큐 스페셜"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온 (왼쪽부터)이연복, 샘킴,최현석 요리사.(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동영상 갈무리)


어쩌면, 요리사 개인의 인기나 지명도가 이렇게까지 방송 3사를 독점할 지경인 것은 곧 정점으로서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요리가 단지 요리로 그치지 않고 이미 엄청난 시청률 경쟁과 셰프들끼리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요식업체들끼리의 피말리는 전쟁 속에서, TV에서 인기 있는 셰프들이 일하는 레스토랑만큼은 최소한 불황을 피해가거나 매출이 상승했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 넘치는 요리 프로그램들의 홍수 속에서, 한국인들은 점점 더 요리 시간이 짧아지며 TV 시청 시간만 길어진다는 씁쓸한 조사결과도 있다. 눈이 즐거운 상태에서 그만 포만감을 느껴 입맛은 없어진다는 의견도 있다. 요리사들에게 시청자가 기대하는 ‘맛’은 분명히 있다. 다만 그들의 본질은 부엌에서 빛을 발한다. TV 프로그램이 담아내야 하는 것은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요즘 들어 논란이 끊이지 않는 요리 관련 프로그램들이 안타까운 이유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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