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밀린 일이 잔뜩 쌓인 책상 너머로 창밖의 봄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답답한 마음 가누기 힘들어 결국 밖으로 나섰습니다. “결코 전과 같지 않을 봄”이 되돌아 온 첫해입니다. 피어나지 못한 304명의 생명이 또다시 바다로, 바다로, 잠깁니다. 자식들이 죽어 간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자식의 명찰을 가슴에 건 어미와 아비는 삭발을 하고 아스팔트 바닥에 서서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맞습니다. 또다시 참혹한 4월, 꽃은 여기저기서 펑,펑, 망울을 틔웁니다. 참 무심하기도 합니다.

봄이 무심하다, 글쎄요. 길목 한편에 서 있는 개나리 나무, 딱딱한 가지를 뚫고 올라온 노란 꽃송이들을 보며 생각을 바꿨습니다. 흔하고 너르게 핀 것이 봄꽃이지만, 꽃송이 하나하나가 망울을 벙글기까지는 태고로부터의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생명은 비좁고 어두컴컴한 씨앗, 혹은 나뭇가지 속에서 자신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아득한 세월을 견뎠을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꺾이고 발에 짓밟히고 배고픈 청솔모의 밥이 될 위기를 하루에도 수백 차례 넘겼겠지요. 그 외롭고 불안한 시절이 마감되고 정작 봄이 가까워 올 때는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햇빛과 바람과 비가 꼭 맞게 조율되는 그 신비로운 한 순간을 기다리는 초조함은 또 어땠을까요. 그리하여 마침내 저 연하고 어여쁜 새싹이 세상에 태어날 준비가 된다면, 나무는 겨우 내 딱딱하게 말라 있던 살갗을 스스로 찢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했을 터입니다.

사진 출처 = 선운사 홈페이지
무심하게 세상에 오는 생명은 없습니다. 불안과 혼란과 아픔을 전제하지 않고 태어나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 많은 생명들이 낡은 것들을 쳐내고 우르르, 한꺼번에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봄은 차라리 폭력입니다. 흔들지 않는 것이 없고, 상처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봄날의 붉은 꽃들은 그 숱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대지의 몸에서 낭자하게 흘러나온 선혈의 빛깔일지도 모릅니다.

사랑, 그리고 부활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봄이라지요. 봄과 사랑은 닮았습니다. 사랑도 봄처럼 폭력입니다. 사랑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라는 궤도에 대낮의 강도처럼 개입하여 일탈을 요구합니다.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사랑은 존재의 질서에 하나의 차이를 만들고 균열을 내려는 폭력적 정념, 다른 모든 대상을 희생함으로써 하나의 대상을 특권화하려는 폭력적 정념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 57쪽)라고 말했지요. 사랑은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당신’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정념입니다. 사랑을 택하는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내 몸과 마음조차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당신, 그이를 향하여 나는 “평화로운” 나의 삶에 상처를 내고 파괴적인 낯선 질서에 투신합니다. 열렬히 사랑할수록 더 초라해고 가난해지는 역설은 또 어떤가요.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오래된 유행가 가사에도 있잖아요.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지요. 사랑은 그렇게 외로움과 혼란을 소낙비처럼 불러오며, 내 안에 혁명을 일으킵니다. 소소하고 평화로운 즐거움으로 채워진 일상의 질서, 그 질서를 지탱하던 낡은 정체성이 파괴되는 순간, 나는 마침내 내 안의 새로운 가능성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내게서 나온 것이나 온전히 내가 아닌, 내가 선택한 당신을 품은,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폭력적인 사랑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신을 산산이 흩어 버린 인간 예수가 만든 기적—‘부활’을 봄과 함께 맞는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극적인가요. 그 사람 예수는 사랑에 휩쓸려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위해 세상에 몸을 던졌습니다. 치열했던 자신의 사랑 만큼 잔인하고 처절한 외로움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그는 목숨마저 버렸습니다. 그리고 잘게 찢은 자신의 몸으로 생명의 떡을 빚어 우리를 먹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를 통해 되살아납니다. 자신을 철저히 해체하여 ‘우리’가 되어 역사 속으로 녹아들어 소생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소멸하여 남으로 더불어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본질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예수가 가져온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은 그러기에 세상의 질서와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차이를 만들고 균열을 내는 폭력적 사랑의 거대한 현현입니다.

‘믿는다’는 것 - 예수의 부활, 부활한 예수

▲ '부활', 제임스 티소.(1836-1902)
그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믿는다’는 말의 라틴어, ‘크레도 (credo)’에 주목합니다.(“Speaking Christianity”, 118-119쪽) 신경(creed)의 어원인 크레도는 “마음(heart)을 주는”행위를 의미합니다. 마음은 가장 깊은 차원의 나 - 생각, 의지, 감정의 뿌리이지요. 그러므로 라틴어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은 그(것)에게 “나를 내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크레도의 영어 번역인 ‘believe’의 중세시대 용례를 살펴보면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집니다. 16세기 이전까지 영어의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즉,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이지, 어떤 ‘명제’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believe’의 어원인 ‘be loef’는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다”를 의미하는 “to hold dear”로서, 오늘날의 의미로 본다면 ‘belove,’ ‘사랑하다’에 가깝습니다.

성서가 영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즈음이니,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를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였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우리말의 ‘믿는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의 ‘믿는다’는 ‘인격적인 신뢰’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지요.’ “어떤 사실이나 말, 이념이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믿는 것’이지만, 그 또한 그냥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나 말, 이념에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보태는 것, 인격적인 무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라틴어, 영어, 우리말의 ‘믿는다’는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사건이지, 마음을 주거나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부활은 경험하는 것이고, 살아내는 것이지, 믿는 대상이 아닙니다. 잘못된 문법은 종종 의미의 왜곡을 초래하는데,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부활이라는 승리의 표징이 예수보다 강조되어 그만 의미가 뒤집혀 버리지요. 마치 부활이라는 기적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승리라는 결과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관심이 없고 자연의 법칙과 인과관계를 거스르는 기적에만 관심이 있거나, 뭘 그렇게 승리하고 싶은지 믿음의 승리를 구한다고 입버릇 처럼 말하기 십상이지요.

단어의 원래 의미를 따져 문장 요소를 재배치한다면,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주어, 서술어, 목적어가 제자리를 찾게 되면 비로소 부활 신앙의 의미가 살아나지요.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도 거스를 만큼 무모한 사랑을 한 그이, 예수를 우리도 또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처절하게 우리를 짝사랑하다 죽어간 그이에게 우리의 마음을 준다, 그의 사랑을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준 상처를 이제는 우리 마음에 새겨 그와 함께 아파한다는 말이며,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룬 그이처럼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면, 그의 삶을 이어 가야, 즉, 그가 떠나며 남긴 부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이처럼 치열하게 사랑에 몸을 맡기고, 돈이 이룩해 놓은 세상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거짓된 평화로 위장한 위선적 종교 가치들을 흔들어, 사람 냄새 땀 냄새 나는 삶으로 이행해야 합니다. 이행은 파괴와 무너짐을 동반하고 그 혼란은 끝이 없을 듯 보이지만, 그 끝에 새로운 생명의 잉태가 있으리란 것을, 예수가 그랬듯, 무모하게 믿어야 합니다. 아득하게 긴 겨울 끝에 봄이 어김없이 돌아와 생명을 쏟아내듯, 죽음의 시절이 아무리 깊고 어두워도 그 끝에는 반드시 삶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 세월호 가족들

되돌아 온 4월 16일, 예수처럼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입니다. 자식을 바다에 묻는 순간 이미 죽은 그들은,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 낳고 기른 사랑하는 아기들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어 어미와 아비들은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참혹한 고통을 또 다른 부모들이 겪게 할 수 없어 그들은 죽음보다 힘든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에서, 안산 분향소에서, 팽목항에서 외롭고 모진 싸움을 견딥니다. 자본과, 국가와, 신자유주의라는 비인간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이 던지는 능욕과 수모를 견디며 그들은 가슴에 묻은 아기들을 위해, 아기들 나이 또래의 아기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산산이 쪼갭니다. 가족들은 그렇게 기꺼이, 예수처럼, 사랑을 선택하여 소멸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떠맡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혼돈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세상, 정적의 한 복판에서 끊임없이 생동하고 꿈틀거리고 소음을 만들어 내는 삶은 지독한 혼돈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혼돈속의 사랑을 준거 삼아 생명을 열어야 합니다. 봄을 열어야 합니다. “같이 가실 거지요? 끝까지 함께 하실 거지요?”애타게 묻는 그들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며, 우리도 함께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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