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올해는 예년보다 늦게 봄방학을 맞았습니다. 교편을 잡은 뒤로 맞는 방학과 휴강은 학생이었을 때보다 갑절은 달콤합니다. 오랜 만에 느긋한 아침 시간을 보내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CBS>의 특집 다큐멘터리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라는 신흥종교와 그 피해자들에 관한 심층 취재 보고이지요. “신천지”가 개신교와 천주교를 막론, 여러 신앙 공동체들 안에 분열을 조장하며, 가출과 이혼, 가정파탄, 자살, 폭행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 왔던 까닭에 도대체 어떤 집단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신흥종교가 발흥하는 맥락을 관찰하면 언제나 그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톺아 볼 수 있기에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과 방영에 진작부터 기대가 높았습니다.

아직 절반 밖에 방영되지 않았으므로 좀 성급한 시청 소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신천지의 조악하고 괴상한 교리가 그토록 엄청난 포교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도 물론 놀랐지만,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 낸다는 “이단 상담소”의 접근 방식에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신천지는 그렇다치고, 신천지에 포섭된 이들을 단기간 내에 교육하여 “교정”한다는 그 상담소의 접근방식도 제게는 별천지처럼 느껴졌어요.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 힘들 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성서에 대한 문자적 이해와 낡은 교리에 의존하여 단순히 “하나의 비논리를 다른 비논리로 대체하는 수준”의 그 “교육”은 적어도 제게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청어람 인터뷰: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정신적으로 문제 있나요”) 기성교회의 교리는 옳고 신천지의 교리는 틀렸는데, 왜 옳은지에 대한 설명은 그저 성서의 문자들을 재배치하여 “우리 교리는 앞뒤가 맞으니까(?) 믿어라”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어요.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격적 배려를 배제한 채, 마치 구마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질문을 하고, 성서 구절들을 대조하며 “옳은” 교리를 주입하는 저런 방식으로 어떻게 그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까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 2012년 10월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신천지 행사.(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평신도 교육의 전제: “그냥 믿어라”?

다큐멘터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신천지가 포교 대상으로 삼는 신앙 공동체들이 주로 근본주의 성향의 개신교회라는 사실입니다. 평소 이웃 교단, 이웃 종교들에 대해 폭언과 모독을 거리낌 없이 퍼붓는 그 교회들을 신천지는 도리어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근본주의 성향의 교회 교인들이 신천지에 가장 쉽게 빠져 든다는 것은 그 교회들이 고수하고 있는 성서읽기와 평신도 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천주교회 내에도 신천지 피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천주교회 또한 근본주의 성향의 개신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겠지요. 즉, “성서와 교리는 어차피 신비의 영역이니 비판적 사고와 질문을 통해 머리로 이해하려하기 보다 그냥 믿어라”는 전제 위에 진행 되어 온 평신도 교육의 문제점은 보수적인 개신교, 천주교에 공히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교육은 성경과 교리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무시한 채, 성경을 거듭 필사하거나, 묵상하듯 그때 그때의 요구에 따라 필요한 구절을 편집하여 의미 중심으로 읽는 것을 성서공부, 교리공부의 최선의 방법이라 믿게 하는 풍토를 만들어 왔지요.

이런 교육 방식에 길들여진 분들은, “왜”라는 질문은 신앙이 부족한 이들이나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렇게 써 있고, 그렇게 가르쳐 왔으니, 그냥 믿으면 된다고 알고 계시지요. 불필요한 질문은 분심이니, 열심히 성사에 참여하고 시간 전례를 바치며 “극복”해야 한다고 믿으시고요.

이 교육 풍토는 본당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시는 많은 교우들이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면서도 완고한 신심을 갖게 되는 까닭에도 기여하는 듯합니다. 양상이 전혀 다르기는 해도, 얼마 전 마크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빌며 광화문 광장에서 대대적인 퍼포먼스를 벌인 신도들로 인해 드러난 일부 개신교인들의 문제점과도 맞닿아 있어요. 비판적 사고가 배제된 풍토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교회의 얼굴을 하느님의 얼굴로 착각하게 되고, 심지어는 권력자들의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오해하여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민망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신학교 따로, 신앙 공동체 따로

제가 대학 신입생이었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저는 천주교인이 되기 전에 개신교 신학대학을 다녔는데요, 성서에 대한 비평적(비판적) 접근을 그때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성서 속 책들의 역사적 배경, 그 책들의 기본이 된 자료들, 그 자료들의 편집과정, 수많은 저자들의 삶의 정황을 드러내는 양식, 그리고 저자들이 적어 내려 간 글들의 결과 무늬를 이루는 문체와 문학 등을 공부하는 것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지요.

기존의 공부는 성서에 적혀 있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생각으로 문자의 뜻을 이해하려는 것에 치우쳐 있었던 반면, 성서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통해 성서 속의 다양한 세계와 문화와 시각과 목소리들을 “발견”하고, 성서의 내용들이 왜 많은 부분 연대기적으로나 내용으로나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는지 알게 되고, 본문이 형성되고 번역, 해석되는 과정에 연관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 문제들 또한 들여다보게 되니 성서에 한층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공부에 경탄하던 와중, 다른 한편으로 선배들을 통해 암암리에 내려오던 “불문율” 같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평신도들에게는 이 성서비평학을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이유는 “알면 시험 든다”는 것, “시험들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었고요. 말하자면, “평신도들에게는 평신도 눈에 맞는 눈높이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해 못할게 뻔하니 괜히 쓸데없는 내용 가르쳐서 “약한 믿음” 뒤흔들어 놓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모 선배가 봉사하던 교회에서 성서비평학과 여성신학을 언급했다가 그날로 쫓겨났다는 소문도 들으며 저 또한 무슨 밀사라도 되는 듯, 학교에서 배우는 것 따로, 교회에서 언급하는 것 따로, 이런 “이중생활”을 한동안 유지했었는데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불문율”을 그대로 따랐던 이유는, 풋내기 신학생이었던 제가 엄하고 보수적인 목사님의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 탓도 있지만, 저 스스로 배운 내용들을 전문적인 신학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풀어서 전달하기에는 견문이 적고 게을렀던 탓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도 안 되는 “평신도 눈높이”는 사실 저 자신의 눈높이였던 것이지요.

이 웃지 못할 일들이 벌써 20년 전 일인데,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친구들이 전해 오는 소식에 따르면 지금도 변함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심해졌다는군요. 평신도 교육은 고사하고, 요즘엔 신학교조차 그저 외우고 시험보고 통과하는 형식적인 공부에 치우쳐 있다고요. 대학에 비판적 사고가 들어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비판적 사고를 돕기 위해 그나마 20년 전에는 인기리에 개설되었던 여성신학, 철학, 사회과학 교양 과목들이 요즘엔 수강 신청하는 학생 수가 모자라 줄줄이 폐강되고 있다고요.

“평신도 눈높이” 교육을 받고 자라 온 젊은 세대들이 신학교에 가서 비판적 사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르지요. 그러니 문제의 그 “평신도 눈높이”는 제거되기는커녕 악순환 되며 “교회의 보편적 눈높이”를 하향평준화 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신도 눈높이”의 편견을 거두자

개신교이건 천주교이건 이 “평신도 눈높이”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신앙 공동체에서 평신도들과 함께 비평적, 역사적, 해석학적 접근을 통해 성서와 교리를 공부해 본 제 동료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실제로 이 접근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은 평신도들이 아니라 목사님들, 사목자들이라고요. 대체로 목사님들은 교우들의 신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염려하시고, 사목자들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것들을 본당에서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신답니다.

반면에 평신도들은 비평적 접근을 통해 성서와 교리를 공부하고 나서 비로소 공부에 재미가 붙어 성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 교리들이 형성된 맥락을 알게 되니 좀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제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본당에서 특강을 열어 성서 해석학과 전승에 대해 쉽게 풀어서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일흔이 넘으신 어르신께서 시간 내내 즐겁게 강의를 들어 주시고 강의가 끝나고 나서는 늘 궁금해 하시던 질문이 풀렸다고 소회를 밝히셔서 제게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많은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그 “평신도 눈높이”는 기우가 아닐까, 또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생각이 아닐까, 두려움과 게으름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평신도들에 대한 “배려”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평신도들이 자신들 보다 더 많이 알게 되어 사목하는 이들의 권위에 도전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답습되어 오던 지식의 독점이 전통과 규율로 굳어 버린 것이지요.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위해

물론, 신앙의 신비는 우리의 이성으로 자명하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성서와 교리에 대한 비판적 접근 또한 한계가 있지요.

마치 인체 해부학이 우리 몸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생명의 신비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는 것처럼요. 그러기에 신앙의 신비를 그저 ‘아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와 겸허한 신심이 모두 필요합니다. 질문하고 비판하는 것과 관상과 기도를 통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행위를 수행하는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이성적인 존재, 인간이니까요. 하느님은 결코 이성을 멈추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성과 감성을 총동원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고민을 통해 당신을 선택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신비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신비에 다가서는 끝없이 설레는 긴 여정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서와 교리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슨 말인가 고개를 갸웃거려 보기도 하고, 성서 속에 등장하는 서사가 부당하고 폭력적이라면 문제제기도 해보고, 다양한 자료와 방법론을 통해 같은 본문도 다른 방식으로 읽어 보고, 말이 되지 않는 맥락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좀 비딱한 질문도 해보고, 여성과 소수자의 시각으로 읽으면 어떻게 다가올까 뒤집어 생각해 보기도 하는 비판적 읽기가 과연 우리 신앙에 위기를 던져 줄까요? 오히려 질문 없는 맹목적인 신앙보다 훨씬 성숙한, 쉽게 무너지지 않는 신앙을 갖게 하지 않을까요? 사목자와 평신도가 능동적으로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고 위기에도 함께 대처하는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꾸려가게 할 튼실한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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