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이다. 무심한 듯 세월은 지나갔고, 그렇게 세월호참사 1주기가 돌아왔다. 그날 그 장면,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어이없이 침몰해 버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여객선, 세월호! 전복된 배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배 밖에서는 기괴한 침묵이 감돌았고, 배 안에서는 304명의 생명이 죽어 가고 있었다. 침묵의 죽음, 죽음의 침묵!

세월호참사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는 기가 막혔다. 구조 책임부서인 해경은 구조는 하지 않고, 손 놓고 바라만 보았다. 아니, 다른 구조 활동을 막고, 방해했다.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며, 청와대는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다음 날 오후, 현장에 나타난 대통령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엉뚱한 질문을 해 댔다. 책임자 색출과 엄벌을 외치며, 자신에게는 면죄부를 줬다. 누구는 지근거리의 유가족들 옆에서 컵라면을 먹었고, 누구는 기념촬영을 했다. 결국, 정부는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우리는 국가의 침몰과 실종을 보았다.

처음부터 오보와 허위보도를 일삼았던 언론은 참사의 본질과 상관없는 세월호의 소유주 이야기를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로 만들어 냈다.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이 오히려 진실을 덮고 왜곡했다. 쓰레기 언론, ‘기레기’였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니, 생겨났다. “도대체 왜!” 가장 절박해진 것은 한 점의 의혹도 없는, 철저한 진상규명이었다. 배와 함께 침몰한, 진실의 인양!

세월호참사 이후, 희생자 가족들의 일상은 사라졌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리에서 시민들의 서명을 받고, 단식을 하고, 뙤약볕 속 도보행진을 하고, 노숙농성을 했다.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갔지만, 차디찬 바닷속, 겁에 질려 죽어 갔을 아이들 생각에,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유가족이 될 수 있게 도와 달라.” 생존자 가족은 유가족에게 미안해 하고, 유가족은 실종자 가족에게 미안해했다. 한 생존 여학생은 아침에 학교에 가다가, 울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살아 나지 못한 친구가 보고 싶다며. 친구가 꿈에 한 번 나와 봤으면 좋겠는데 안 나온다며, 울며 돌아왔다.

정부는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과 슬픔의 수렁 속에 빠져 있는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처음부터 희생자 가족들을 감시했고, 진상규명 요구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정부와 대통령은 경제타령을 시작하며 서서히 태도를 바꾸었다. “세월호가 경제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세월호 희생자나 그 가족이 아니라 여전히 경제였다. 세월호참사의 근본 원인에 돈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돈이었다. 세상의 변화는, 없었다. 세월호참사도 결국 교통사고가 아닌가,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이런 저런 교설로 참사의 의미를 폄하하고, 희생자 가족들의 요구를 왜곡하고, 세월호참사의 기억을 희석하고 훼손하려는 시도가 사방에서 교묘하고 집요하게 펼쳐졌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과정은 더뎠다. 정치권에서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특별법 제정은 국회 소관이라며 발을 빼던 대통령은 느닷없이 수사권과 기소권 불가라는 지침을 제시했다. 결국 그들의 입맛에 맞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빠진 ‘4.16특별법’이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해양수산부가 입법예고한 특별법의 대통령령(시행령)은 그런 특별법마저도 완전히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논란이 일자, 정부는 갑자기 배상과 보상 계획을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즉각,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권력에 화답했다. 언론은 여전히 ‘기레기’였다. 참으로 천박하고 잔인한 세상이고 세월이다.

1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우리는 4월 16일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세월호는 바닷속에, 그대로다.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도, 그대로다. 아니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거기에,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가고 있다. 이 모든 걸 보며 나오는 결론, “애초부터 ‘그들’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걸 보며 올라오는 의문, “절대 밝혀져서는 안 될 그 무엇이 있지 않다면, 이렇듯 집요하게, 이렇듯 조직적으로 방해할 리가 있을까?” 그래서 밝혀진 사실, “세월호참사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다.” 그래서 얻은 결론, “숨기려는 자, 범인이다!” 그렇다! 숨기려는 자들, 그들이 바로 범인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진실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둠의 인간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한 3,19) 그들은 힘 있는 자들, 세상의 권력자들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이 악한지 알기 때문에, 빛으로 나서지 않는다. 빛은 그들의 정체를 훤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비춰주는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 그래서 그들은 은밀히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받았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는 그들, 빛 자체이신 하느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는 어떻게 됐나요?” 한국에서 단 5일을 지내고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종, 바티칸에서 한국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했던 물음이다. 일각의 걱정을 일축하고, 방한 기간 내내, 노란 세월호 리본을 가슴에 달았던 교종이었다. 시복식 당일, 퍼레이드 중에 차에서 내려 손을 잡으며 유족을 위로했던 교종이었다. 귀국 길,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며 자신의 입장을 명쾌하게 밝혔던 교종이었다. 반년이 지난 뒤에도,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깊은 관심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교종의 마음은 언제나 밖을 향하고 있다. 그것도 변두리, 힘없고 억눌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왜? 답은 간단하다. 예수가 그랬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십시오. 그래서 밖에서 울고 있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십시오.” 프란치스코 교종이 취임 뒤로, 줄곧 우리들에게 당부하고 호소해 왔던 것, 바로 이것이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도 밖으로, 낮은 곳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밖으로 나가 보호자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느님이 먼저 하느님 자신 밖으로 나와 세상으로 들어오셨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요한 3,16-17) 그렇다. 강생과 육화의 동기는 바로 사랑이다. 그 외의 동기는, 없다. 나자렛 예수는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 왔다. 그래서 예수의 삶 또한 본질적으로 밖으로의 역동성이다. 예수께서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섰고, 그들과 함께 했다. 예수를 이렇게 이끈 동기는 사람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 연민이었다. 연민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다. 연민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 예수는 그들과 연대했다. 예수의 연대로써, 사람들은 변화를, 해방을 체험했다. 예수는 연민과 연대에 혼신을 다함으로써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에서 하느님을 체험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과 슬픔과 번민을 겪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다.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슬픔과 고통과 번민을 함께 하며 위로하는 것,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 바로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이고, 이들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입증되는 곳도 바로 여기다.

세월호참사를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제 됐으니, 그만하자고 한다. 희생자 가족들을 비웃고, 심지어 모욕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카인에게 했던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카인의 퉁명스러운 대답이다. 나의 안락함을 위해, 밖을 내다보길 거부하면, 울고 있는 이웃을 모른 체하면, 나도 어느새 카인이다. 무관심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카인들의 세상! 밖에서 울고 있는 이웃은 더 이상 형제자매가 아니라 우리의 삶, 나의 안락함의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배제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서글프고 추악한, 우리의 현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같은 우리의 현실을 영적 세속화라고 부르며, 거듭 강하게 비판하신다. 영적 세속화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것, 자기 몰두를 뜻한다. 영적 세속화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태도, 삶의 양식을 가리킨다.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무엇입니까?” 영적 세속화! 교종의 대답이다. 교종은 번영하는 한국 교회에 주의하라는 조언을 잊지 않으셨다.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안주하지 말라고, 주위에서 울고 있는 이웃,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영적 세속화는 육화를 무색하게 만들고, 부정한다. 그 결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세계 도처에 만연하고 있다. 영적 세속화에 물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일 수 없다. 영적 세속화에 빠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도록, 서로의 보호자가 되도록 불림 받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안’이 아니라, ‘밖’을 바라본다. 사랑은 자기 안에 머물지 않고, 자기 밖으로 향한다. 영적 세속화는 사랑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이다. 참된 영이신 하느님의 역동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이 빛을 잃고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4월, 희생자 가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 선체 인양을 통한 실종자 수습, 4.16특별법 대통령령 폐기를 요구하며 삭발을 감행했다. 많은 시민들과 함께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광화문 세월호 광장까지 1박2일 도보행진을 했다. 집회를 마무리하며, 시민들과 희생자 가족들은 광장에서 서로 마주 보며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굳은 다짐의 인사를 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영정 속의 아이들, 살아 움직일 듯 천진난만한 얼굴들, 순진무구한 눈망울들이 마음 속 깊이 들어왔다. 모두, 서로 껴안고 흐느꼈다. 함께 슬퍼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했다. 만남과 접촉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 사람들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하느님이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이유다. 예수께서 사회의 변두리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먹고 마시며 어울린 까닭이다.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것, 아픈 현실에 내 몸을 부딪치는 것, 고통을 겪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세월호참사 1주기, 우리의 무관심을 걷어내겠다고 다짐하는 때여야 한다. 이제는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잊지 않겠다고, 함께 울고, 아파하고, 위로하겠다고 약속하는 때여야 한다. 어둠의 세력에 함께 분노하고, 저항하고, 행동하겠다고 결단하는 때여야 한다.

세월호참사의 처리와 수습, 특히 진상규명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결코 흐지부지 처리해서는 안 된다.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 해도, 아무리 어렵다 해도, 어떤 방해가 있다 해도. 바다 깊은 곳에 파묻힌 진실을 반드시 끌어올려야 한다. 철저한 진상규명은 304위, 세월호의 넋들의 간절한 호소며 울부짖음이다. 철저한 진상규명만이 봄날, 벚꽃처럼 스러져간 세월호의 넋들을 위로하는 길이다.

진실을 끌어올리는 길에 우리는 아직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 박해마저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빛으로 나가려 하지만,(요한 3,21 참조) 빛을 미워하는 어둠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 것은 없다.(마태 28,10 참조) 우리는 빛의 사람들,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다.(1요한 5,4 참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 진리이며 사랑이신 하느님께 언제나 속해 있는 것이다. 진리의 요구, 사랑의 요구에 담대하고 성실히 응답하는 것이다.

다시,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 자신을 옥죄여 왔던, 하느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어둠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혼신을 다해 연민과 연대의 삶을 살았다. 그 예수께서 우리를 격려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아무리 깊어 보여도,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어둠 속에 묻힌 진실은 결국 빛이 되어 떠오를 것이다. 그때까지, 기억하고, 분노하고, 저항하고, 행동할 것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