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단상

부활, 기쁨과 평화의 부활!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기쁨과 평화와 너무도 거리가 멀다. 참담한 현실, 우리의 때는 아직도 밤이다.(요한 13,30 참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다. 봄! 꽃망울 터지고, 여린 신록 움터오는 봄! 하지만, 우리의 때는 아직 겨울이다. 수많은 어린 꽃들, 신록들을 거센 물살, 차디찬 바다에 처박아 놓고, 아무 일 없었던 양 그렇게 지내자는, 아니 이미 그렇게 지내고 있는 세상, 살을 에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겨울이다. 어둡고 춥기만 하랴. 지금은 야만과 음모의 때다. 4.16특별법과 특별조사위원회의 무력화를 겨냥한 시행령, 시행령 폐기 요구를 덮어 버리려는 배상과 보상이란 이름의 돈, 억울함과 분노로 삭발한 유족들이 비닐 한 장 들고 비바람 속 광장으로 나가야만 하는 현실, 분명 야만과 음모의 때다.

예수 부활! 소리 없는 도살장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활’은 도대체 무슨 뜻이 있을까? 세월호 1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부활’이란 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하려는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하여, 부활 이전의 예수로 다시 돌아가 본다. 확실한 것 하나, 적어도, 예수는 자신에게 고난과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상했다. 부활은 자신에게 임박한 폭력적 죽음에 대한 예수의 최후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 또한 바로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 오는 거대한 죽음의 세력 앞에 섰던 혈혈단신의 예수, 번민과 고뇌 속에서도 하느님과 이룬 일치와 친교에서 알아들은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기로 결단했다. 결과는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죽음이 예수의 끝은 아니었다.

전심전력,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다 십자가에서 삶을 마감한 예수에게 ‘무엇인가’ 일어났다. 부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은 여기까지다. 그 이상은 하늘과 땅, 모든 존재와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창조주 하느님의 영역이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다.(요한 20,9; 사도 10,40) 예수의 최후의 결단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다. 그렇다면, 부활은 예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엄정하게 다시 살펴보라는 초대다. 부활은 사도들에게, 하늘만 바라보지 말고 다시 갈릴래아, 자신들의 현실로 돌아와 예수의 가르침을 살아 내라는 초대다. 부활은 우리에게, 아직도 어둠과 추위, 음모와 야만이 기승을 떠는 우리의 암울한 현실로 돌아와 바로 거기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 내라는 초대다. 그래서 다시 올라오는 물음, “예수는 누구였나?” “예수는 무엇을 하려고 했었나?”

예수는 연민의 사람이었다. 창조주 하느님과 이룬 깊은 일치와 친교에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존재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이다! 모든 인간은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의 자녀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다! 이 깨달음이 예수를 연민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연민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예수를 이끌었다. 예수는 세파에 시달려 지친 사람들을 보면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마태 9,36) 연민이 일어, 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아픈 이들을 낫게 해 주었다.(마태 14,14-21 참조) 연민이 일어, 나인 고을의 과부에게 다가가 외아들을 잃은 아픔을 달래 주었다.(루카 7,12-14 참조) 연민의 사람 예수, 깊은 관심과 공감의 사람이기도 했다. 공감 없이는, 연민도 없다. 관심 없이는, 연민의 가능성도 차단된다. 강도를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어도, 사제와 레위 사람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무관심에 공감과 연민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에 다가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0-33) 관심은 공감과 연민의 산실이다. 예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 작년 추석 당일, '세월호 가족 지원 네트워크'에서 준비한 음식을 광화문 광장에서 같이 먹는 사람들. 추석 당일인데도 2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음식을 준비했다.ⓒ강한 기자

예수는 연대의 사람이었다.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 연대를 호소했다. 물론, 예수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했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자기와 동일시했다.(마태 25,31-46 참조) 하지만 이것이 예수의 편파성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예수는 당시 가장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함께함으로써, 이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심으로써, 보편적 연대를 가장 극적으로 실천해 보였다. 보편 연대성은 연민으로만 가능하다. 다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강도를 당해 길에 쓰러져 있던, 필시 유대인이었을 그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가엾은 마음” 때문이었다.(루카 10,33) 연민으로 시작된 예수의 연대는 섬김으로 이어졌다. 섬김은 세상의 억압적 질서의 전복, 세상의 근본적 변혁을 뜻했다.(마르 10,42-45 참조) 예수는 단순히 기존의 지배구조의 전복과 역전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지배구조의 출현을 뜻할 뿐이다. 지배구조의 종식은 서로가 서로를 섬길 때에만 가능하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예수의 마지막 당부는 바로 ‘서로 섬김’이었다. 예수는 서로 섬김을 통해 세상을 뒤흔듦으로써 세상의 지배 구조를 종식하고, 거기에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심으려했다.

예수는 부활로 우리에게 연민과 연대의 삶을 보여 주었고 물려주었다. 당시의 시절이 호락호락해서 예수의 연민과 연대가 가능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수의 시대는 로마의 살인적인 폭압 통치로 유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엄혹했던 때였다. 절망 속에 빠져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연민과 연대로 다가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지친 이들에게 새 기운을 일으켜 일어서게 해 줄 수 있었던 것, 바로 희망이었다.

당시의 엄혹한 상황 속, 연민과 연대의 삶을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예수는 분명, 희망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희망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왔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꽃들을 보살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6,26-28; 10,30 참조)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이 믿음과 희망은 어떤 절망과 체념도 물리쳤다. 예수는 자신의 믿음으로 절망과 체념에 빠진 이들에게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열두 해나 앓아 오던 여인의 병을 치유한 것, 여인의 믿음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두 장님의 눈을 치유한 것, 그들의 믿음이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해방을 경험했고, 변화했다. 예수로 인해 생겨난 믿음으로 희망을 길러냈다.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흔들리면, 해방과 희망도 없었다.(마르 6,5-6; 마태 17,19-20 참조) 예수에게, 믿음은 전능한 힘이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믿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낳는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예수의 불굴의 희망, 바로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올라오는 물음! 어둠과 추위, 음모와 야만의 시절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 연민과 연대의 삶을 향한 불굴의 희망이다. 부활한 예수는 슬픔과 낙담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부활의 희망은, 그 희망에서 솟아나는 설렘은 절망과 체념의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라고, 밖으로 나서라고 우리를 재촉한다. 첫째, 힘없는 사람들, 배척되고 소외된 사람들과 연민과 연대로 함께 할 것! 둘째, 없는 이들을 몰아세우는 자들에게 분노할 것! 이런 자들에 대한 분노는 연민과 연대의 부정이 아니라 또 다른 표현이다. 예수 또한 연민과 연대를 가로막는, 완고한 마음에 분노했다.(마르 3,5 참조) 셋째, 연민과 연대를 가로막는, 그 어떤 거대한 힘에도 결코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말 것! 그때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한결같은 뜻인 연민과 연대의 삶에 전심전력할 것! 우리가 할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이다. 예수의 결단과 헌신이 그랬듯, 우리의 결단과 헌신 또한 헛되지 않을 것이다. 부활이 알려 주는 기쁜 소식이다.

예수께서 곧 헤어질 제자들에게 건네셨던 말씀을 다시 기억하자.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

예수 부활을 함께 기뻐합니다.

사진 출처 = pixshark.com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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