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찬 성목요일

이제 남은 시간은 오늘 저녁뿐, 이제 곧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던 제자들과 음식을 같이 나누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기로 했다. 왜 하필 씻는 것이었을까? 왜 하필 ‘발’이었을까?

발을 씻기겠다고 나선 예수의 행동에 제자들은 처음 당황했으리라. 발 씻는 거야 일상이지만, 다른 사람이 내 발을 씻기는 것은 그렇지 않다. 메마른 땅 팔레스타인, 샌들의 발은 먼지투성이였을 것이다. 덜렁대던 베드로의 발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더러웠을지 모른다. 베드로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요한 13,8)

사실 우리도 비슷하다. 성목요일, 발 씻김 예절의 참가자로 뽑히면, 발을 씻어 준다는데도, 아니, 발을 씻어 준다니까,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발을 씻고 온다. 왜 그럴까? 손을 씻어 준다고 해 보자. 여전히 쑥스럽긴 해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거다. 몸의 다른 부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가고, 왠지 좀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곳, 발이다. 자기 발이지만, 잘 보지 않는다. 남에게는 더더욱 보이지 않으려 한다. 그런 발을 갑자기 씻어 주겠다고 했으니, 제자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어쨌든 제자들은 있는 그대로, 그리 깨끗하지 않은 발을 내밀었다. 예수는 하루를 지내며 먼지투성이가 된 제자들의 고단한 발을 보듬고 씻겼다. 처음엔 쑥스럽고 민망했을 제자들! 하지만 예수의 손길을 따라 전해진 예수의 마음을 읽으며 제자들의 마음도 차츰 변해 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제자들을 끝까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예수의 마음은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의 발로 전해졌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들의 발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 잡고 씻겨 주는 예수의 손길을 통해 제자들이 체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들 대부분이 어릴 때에 하게 되는 체험, 바로 ‘엄마 체험’이 아닐까? 엄마들은 손으로 아이들의 발을 보듬고 뽀득 뽀득 씻어 준다. 엄마에게, 아이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괜찮다. 엄마는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인다. 아이는 자기에게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찾아오는 것, 평화!

▲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 틴토레토.(1519-94)

“받아들여짐”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우리에 대한 예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이 체험이 없으면, 예수를 알 수 없다. 예수를 제대로 따를 수 없다. 이 체험을 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교회라는 공동체가 생겨난다. 예수께서 발을 내놓지 않으려는 베드로에게 단호했던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그렇게 되면,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라 해도, 실제로는 예수를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도 이 체험을 이어 가야만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다. 천금 같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해 준 것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것’이었음을 기억하자.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매일 반복하는 행위들이다. 씻는 것이나 먹는 것과 같이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언제나 해 줄 수 있다.

누구에게 먼저 다가갈까? 예수께서 구태여 ‘발’을 씻긴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자.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 이들이 우리가 먼저 다가가야 할 사람들이다. 사실 예수의 제자들도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제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 가까웠을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고 그나마 가진 것도 포기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아니면 이젠 별로 갈 곳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대학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학생들. 취업준비가 핵심이 되어 버린 왜곡된 교육현실에서 성장한 학생들. 그래서 다른 건 알지도 할 줄도 모르는 학생들. 헌데, 도대체 취직이 되지 않는다. 겉으론 태연한 척 해 봐도, 속은 바짝 타들어만 간다. 시기를 늦춰 보려고 휴학, 졸업유예가 늘어난다. 누구에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일찌감치 기가 꺾여 버린, 사회의 눈치만 보는 학생들.

부당해고를 당한 채, 길게는 십 년씩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해고노동자들. 좀 어떠냐는 안부 인사에 괜찮다며, 씩 웃고 마는 볕에 그은 꺼칠한 얼굴의 노동자들. 하지만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마찬가지다. 아니 더하다. 절박한 마음 하나 부여잡고, 크레인으로, 굴뚝으로, 송전탑으로, 전광판으로 올라가는 노동자들. 그렇게 해도, 자신들의 간절한 외침을 모른 척 외면하는 잔인한 사회, 각박한 시절을 지켜만 봐야 하는 노동자들.

일 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실종자가 아홉 명이나 되는 304명의 세월호참사 희생자들. 도대체 왜 한명도 구하지 못했는지, 구하지 않았는지 알아야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요구를 했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철저히 외면, 거부당한 유족들. 이 엄청난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호소하느라 거의 매일 거리를 헤매 온 유족들. 가까스로 구성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 정부는 무력화시키지 못해서 안달이다.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 갈 길은 너무 험하고 멀다.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속이 다 타 버린 유족들.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억울함과 절망에 빠진 이들의 발을 씻어 줄 수 있을까?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하는 것, 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우는 것,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는 것. 이들의 보호자가 되는 것. 이를 우리는 연대라 부른다. 연대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도움이 아니다. 우리가 다가가 보듬고 씻어 준 이들,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 다른 이웃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발을 씻어 준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북돋운다.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함께 살아난다.

“그래, 우리 서로에게 어깨가 되어 주자. 함께 걸어가자.” 생의 마지막 저녁,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예수의 속내가 아닐까? 그 일을 다시금 기억하고 되새기는 오늘 저녁, 우리에게 전하는 당부가 아닐까? 예수께서 발씻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신 당부를 언제나 기억하자. 특히, 힘들 때, 도대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예수의 이 말씀을 함께 기억하자. 그래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쉴 곳이 되어 주자. 그것만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마음을 오늘 우리 삶에서 다시 살아 내는 길이다. 그럴 때, 칠흑 같은 어둠 속, 죽음을 뚫고 나온 생명의 빛, 부활이 우리를 비춰 줄 것이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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