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2월 1일 (연중 제4주일 ) 마르 1, 21-28

오늘 복음은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신원(身元)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영을 내어 쫓아서 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경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오늘의 신문 기사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정신 질환자를 지칭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대에는 자기 사상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안에 자기가 전하고 싶은 사상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이들에게 옮기면서, 그 이야기 안에 있는 저자의 사상에 공감하고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마르코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리스도 신앙을 담아서 각색한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끝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신앙고백을 그 시작과 그 마지막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기록하겠다는 의도로 저술한 복음서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문제들을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단어로 요약합니다. 사는 것, 늙는 것, 병고 그리고 죽음, 인생의 네 가지 현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지만,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인간 번뇌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 추앙받는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일찍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수도를 시작한 것도 이 네 가지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있으면서 각양각색의 종교들이 발생하고 번창한 것도 바로 이 네 가지에 대한 해답을 인류는 꾸준히 찾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해를 보고, 혹은 달을 보고 빌기도 하였고, 정화수를 떠 놓고 정성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모두가 이 불가사의한 주제들에 대한 해결 혹은 극복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이야기의 무대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회당입니다. 그곳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면서 그 더러운 영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았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 더러운 영이 지배하던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 곧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더러운 영은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근거가 되어 오늘의 세례 성사 의례 중 마귀를 끊어 버린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면서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세례에서 끊어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 사탄아 물러가라, 일리야 레핀.(1844-1930)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함구령을 자주 언급합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 복음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혹은 거룩하신 분 등,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닌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이 복음서는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서,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십자가의 죽음을 시야에서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인식해야 하고, 그 인식을 기반으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말이 십자가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끝을 맺은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다는 우리의 통념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믿어서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더 많은 재물과 더 존경스런 지위를 얻도록 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계속 품었던 염원입니다. 그 염원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염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망상하는 것은 예수 귀신의 힘으로 팔자 한 번 고쳐 보겠다는 인간의 염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생로병사의 인간 현실을 살면서 이웃을 보살피는 섬김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실천에서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읽어 내고, 그것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을 약속하는 더러운 영이 물러나는 곳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 그분의 자녀 되게 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고백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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