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 ) 마르 1,7-11.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서 그분이 세례 받은 사실을 우리가 기념하는 오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실을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구원자라고 믿는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 하나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이야기입니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서민을 대상으로 세례운동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만 세례를 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에 그분이 가담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운동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정결례였다면, 요한의 것은 죄를 씻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 것을 약속하는 세례 운동을 펼쳤습니다. 요한은 유대교의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 우리의 삶을 바꾸어 올바르게 살자고 외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 예수의 세례, 피에트로 페루지노(1507)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동시에 알립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님이신 것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요한보다 뒤에 오셨지만, 사실은 요한과 비교되지 않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있게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지만,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라는 요한의 교훈을 계승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안에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그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초기 신앙인들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후광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 선택하신 종이었습니다.

이사야서는 또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리라.’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분은 목소리를 높여 외치며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주신다고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성전 의례를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몇 명 되지도 않는 제자들을 모아서 초라하게 또 조용하게 가르치면서, 하느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스스로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용서를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을 받들어 사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사야서가 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단죄하여 부러트려 놓은 약자들을 예수님은 꺾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라는 확신과 희망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병이 있어서 꺼져 가는 생명들을 절망 속에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초기 신앙인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렸다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성령이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었으며,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우리의 숨결로 삼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외치지도,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외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꺾어버리지 않습니다. “수고하며 짐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마태 11,2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좌절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회가 오면 그들을 돌봅니다. 우리는 심지가 꺼져 간다고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합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꺼져 가는 생명들 안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나 한 사람 잘 되자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의례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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