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월 25일 (연중 제3주일 ) 마르 1, 14-20.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삶 안에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현세든 내세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곳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벌주시는 분?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들을 이야기로 남기면서, 그것을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 불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치듯이, 하느님은 사람들을 벌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우리 죄에 대해 하느님이 하시는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고 당신의 일을 실천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질서를 기준으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느님이 축복하신 것이라 믿고, 그것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우리가 불행할 때는 하느님이 벌을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질서를 기준으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합니다.

오늘 복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질서에 준해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하지 말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며 살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전능은 인간이 꿈꾸는 것입니다. 인간은 능력과 권력을 가지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도 해 주고 불행하게도 합니다. 조직폭력배의 두목은 그 부하들 앞에 전능합니다. 부하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해 줄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도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전능의 의미

▲ 그리스도를 찾는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 윌리엄 블레이크(1819)
그러나 하느님이 전능하다는 말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창조하고 섭리하신다는 말은 당신의 선과 자비를 실현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외면하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면하였다고 하느님은 상처받고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선과 자비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외면하면, 선과 악의 기준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에 드는 일이 선하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악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외면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면서 자기 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만 추구하는 볼품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하느님을 지워 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선과 자비도 삶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살벌한 사회와 무자비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남성 호칭만 사용된 것은 남성 위주의 부권(父權)사회였던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인간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고,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인간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생명의 기원에 선(善)과 자비가 있었고, 인간은 그 선과 자비를 받들어 배워 실천해야 하는 생명체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이용하여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와 함께 있으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녀의 기쁨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실천한 일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초기 신앙인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도 선하고 자비로운 일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실천한 병 고침과 죄의 용서는 하느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병고도 있고, 배신도 있으며, 실패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겪어야 하는 실망도 있고, 아픔도 있습니다. 인간 생명은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웃고, 울면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고통과 불행은 사라지고, 좋은 혜택만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인간 현실을 바로 봅니다.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주변을 봅니다. 그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시게 하는 일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부른 것은 그 말씀과 실천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또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 나선 네 명의 어부가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 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자기에게 소중했던 인간관계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어느 날 하느님을 우리의 삶 안에 모셔 들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애착하는 인간관계와 사물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화려했던 우리의 꿈들도 그 실상을 드러낼 것입니다. 인간이면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는 인생의 순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욕과 욕심과 꿈이 아직 살아 있을 때, 그것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게 살자고 가르친 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애착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녀가 되자는 운동을 일으킨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게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있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카 17, 21)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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