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월 18일 (연중 제2주일 ) 요한 1, 35-42.

요한 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세 개의 다른 복음서가 먼저 기록되어 신앙인들이 이미 읽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그 세 개의 복음서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고, 그 내용을 그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인 이야기 양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고백하였다는 이야기와 안드레아와 베드로가 그 고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 복음서는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증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서 피 흘려 바쳐지는 희생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9,22)에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지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죽임 당한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성전에서 속죄의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같은 예수님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그 증언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서는 다른 곳(요한 15,5)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그대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요한 15,9-10).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그분이 보여 준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분이 실천한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박씨 물어다 주는 제비가 아니다

▲ 베드로에게 열쇠를 돌려주는 예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20)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여준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당신이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국권(國權)을 회복해 주고,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해 주는 왕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요한 6,14)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당신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고 말합니다. 예수는 사람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독립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여 성취할 일입니다.

흥부전에서 제비가 흥부에게 박씨를 갖다 주었습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흥부는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대박이 터져,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흥부의 꿈을 제비가 이루어 주었습니다. 예수는 그 제비와 같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예수 시대 혁명당원이라는 이스라엘의 분파가 기대하던 하느님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하느님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정성을 바치면, 재물도 생기고 출세도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 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어 피를 흘린 분입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고, 그 사랑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랑 안에 살고 계신지를 보고 제자도 같은 사랑 안에 머물렀더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몸소 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어 피를 흘린 메시아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실천하면서 하느님 자녀가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으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생명을 위해 기여하고 죽어 갑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삽니다. 그렇게 유아독존하는 생명은 볼품없는 자기 모습 하나 남기고 허무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의 순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은 하느님 생명의 순리를 살라고 권합니다. 그 순리를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내어 주는 몸’이라는 성찬에 참여하고, 스스로를 내어 주는 순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소인의 근성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대의를 실현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며’ 그의 이름을 바꿔 놓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 양’, 곧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이 한 실천들을 우리도 행하면서 가능한 일입니다. 곧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면서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이 실천한 대의를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그 실천 안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메시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실천을 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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